“목동입니다.” 여전한 음성이었다. “장군님 저 집 앞에 왔어요”라고 하니까 “오늘 미안한데 다음에 보면 안 될까?”라는 답이 들려 왔다. 난 지난 3년 내내 설과 추석 빠지지 않고 꼬박 민 장군을 찾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3월 17일 그를 다시 찾았다. 그는 내가 앉자마자 아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모님이 죽어가고 있어.” 19년 전 민병돈 장군의 아내 고 구문자 여사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다. 10개월을 병상에서 보낸 뒤 퇴원하던 날 병원장은 민 장군을 따라 나서 귀에 속삭였다. “지금은 이 정도로 살아 나가지만 뇌졸증으로 한 번 쓰러진 사람은 10년을 못 넘깁니다. 10년 이내에 또 쓰러지면 그땐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그는 종종 “의사가 아내 수명이 10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벌써 10년 가까이 더 살았어. 과학이란 게 참 좋아. 선물이야 선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민병돈 장군은 아내를 부축해 달마을공원이라 불리는 목동 근처 작은 동산에 자주 다녔다. 3~4년 전부터는 나이가 들어 그조차도 어렵게 됐다. 집 앞 마당을 돌며 화초 가꾸고 TV로 녹화해 놓은 ‘야인시대’를 보는 게 두 노부부의 일상이었다.
2월 21일 두 노부부는 여느 날처럼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보통 구 여사는 재미있는 게 나오면 깔깔 웃기도 하고 악한이 나오면 “아이구 저 나쁜 놈”이라고 반응했다. 그날은 좀 달랐다.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조용했다. 민 장군은 이상한 마음에 옆을 봤다. TV를 향해 앉은 아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당신 왜 그래?”라고 했다. 구 여사는 이내 쓰러졌다.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일주일차쯤 주치의가 말했다. “저희 병원에서 더 이상 손 쓸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민 장군은 의사의 요양병원 이송 제안을 수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못 알아보던 구 여사는 요양병원에 가서 차츰 좋아졌다. 민 장군만 알아봤다. 말은 못했지만 눈을 맞췄다. 민 장군이 “나 누군지 알아?” 하면 눈이 빛나며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남편.” 구 여사가 말할 수 있는 단어 하나는 이게 다였다.
구 여사는 병실에서 종종 울었다. 민 장군은 “나 있는데 왜 울어. 나 당신 옆에 늘 있어. 울지마 울지마” 했다. 구 여사는 민 장군이 그렇게 다독이면 울음을 그쳤다. 구 여사를 돌봐준 요양사는 말했다. “여사님은 할아버님 오셨을 때 제일 좋아하는 표정을 보이세요. 전 표정 보면 알아요.”
보통 사람들은 민 장군을 마음씨 좋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본다. 해마다 5월만 되면 무작정 문 두들기고 들어와 “5•18의 진실을 말하라”고 카메라를 들이미는 방송사 기자도 정중히 자신의 서재로 안내하는 그다. 하지만 민 장군은 스스로를 가리켜 상당히 지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난 굉장히 날카롭고 무서운 사람”이라며 말했다.
“난 사람도 여러 명 죽여 봤거든. 6•25 학도병 때 총도 맞아 봤고 사람도 죽여봤어. 소령이었던 월남전 때는 연대본부 작전 참모였어. 대부대 작전을 했지. 작전 때는 어마어마한 화력을 퍼부어. 그럴 때 ‘또 떼죽음이 나겠구나’ 싶기도 하지. 근데 그거 일일이 생각하면 어려워. 눈 딱 감고 하는 거야. 거기 있을 땐 인간이라기 보단 살인기계야. 그렇게 난 사람도 많이 죽여본 사람이야.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그는 날마다 오전과 오후 아내가 있는 요양병원엘 갔다. 밤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혼자 있으면 소리를 내 울었다. 막 흐느껴 울었다. 그가 말했다.
“솔직히 나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이만큼 울지 않았어. 그냥 눈물만 흘렸지 입에서 울음 소리 안 나왔어. 근데 이번에 거실에서 소리 내서 울었어. 내가 상당히 독한 놈인데 부부가 이런 건가 싶어. 부부라는 게 다 좋은 게 아니야. 이혼 직전까지 가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이혼하는 사람도 있잖아. 차라리 그런 관계라면 이렇게 슬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슬퍼.”
“내가 놀랬어. 내가 이렇게 많이 연약한 사람인가 하고. 늙으면 친구들 중에서도 죽는 사람 있잖아. 여러 명 봤지. 그땐 안 그랬어.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이렇게 되니까 그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환자한테 눈물 보이면 안 되거든. 병문안 갔다가 눈물이 나오면 일어서서 ‘나 화장실 갔다 올게’ 하고 좀 쉬었다가 다시 가곤 그랬어.”
시계는 4시를 가리켰다. 그는 “병원에 한 번 더 다녀올까 해”라고 말했다.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니 손사래 쳤다.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그다. 몇 차례 졸라서 병원까지 함께 갔다. 그는 계속 “염치가 없어서 데려다 달라고 할 수가 있나”라고 했다.
병원 도착 직전 건널목에서 그는 “이만하면 됐으니 내려달라”고 내게 말했다. “병원 앞까지 모시겠다”고 해도 괜찮다며 내리려 했다. 오르막이라 문은 쉬 열리지 않았다. 여든넷 그에겐 SUV 문짝이 무거웠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민 장군을 부축해 요양병원 입구까지 함께 갔다. 그는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줬다.
4월 14일 늦은 밤 친구가 문자 하나를 보내줬다. 구 여사의 부고였다. 아차 싶었다. 이튿날 일어나자마자 장례식장을 찾았다. 민 장군은 노신사 셋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군님 저 왔어요.” 그는 놀라며 내 손을 잡았다.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연신 고맙다고 했다.
16일 오전 7시 구 여사의 발인이 시작됐다. 구 여사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됐다. 민 장군은 아내를 화로로 보내며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못 볼 걸 본다”고 말했다. 눈물을 계속 훔쳤다. 화로에서 아내가 나왔을 때도 민 장군은 계속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했다. 화장이 끝난 뒤 민 장군은 한 줌 재가 된 구 여사와 집으로 향했다. 54일 만이었다. 민 장군은 아내와 함께 산책하던 집 앞 마당을 아내의 안식처로 정했다.
아침잠이 많은 내게 민 장군 찾아가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는 내가 “찾아 뵙고 싶다”고 하면 “바쁜 사람이 뭘 늙은이 본다고 와”라고 거절한 뒤 못내 수락하며 늘 오전 9시쯤 오라고 했다. 만나서 두세 시간 세상이 돌아갔던,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배꼽시계가 울렸다. 난 늘 오전 11시 50분쯤 나왔다. 거동이 불편했던 민 장군의 아내가 밥 한 공기 더 푸는 수고를 덜고 싶어서였다. 구 여사는 늘 날 붙들고 “한 숟갈 들고 가라”고 했다. 한 끼라도 함께 할 걸 그랬다.
구 여사 발인날 나는 가족도 아닌데 화장터까지 따라갔다. 전하지 못한 아카시아 꿀 때문이었다. 3년 전쯤 민 장군 선물로 아카시아 꿀을 사간 적이 있었다. 친구가 아카시아 꿀 장사를 시작해서였다. 민 장군은 다음 번에 내가 찾아가자 “아내가 꿀을 매우 맛있게 먹었어”라고 했다. 해마다 챙겼다. 하지만 친구의 아카시아 꿀 사업은 얼마 가지 못했다. 구 여사가 소천하기 얼마 전 민 장군을 만나러 간 날 난 아카시아 꿀 대신 홍삼 절편을 가져갔다. 민 장군은 내게 말했다. “쓰러지고선 아내는 일반적인 식사를 못했어. 콧줄로 연명만 했어.” 그 이야기를 들은 이래 아카시아 꿀은 내 목구멍 깊숙이 가로걸려 있었다.
구 여사는 말을 좋아하고 즐겨 탔다. 하늘나라 가는 길에 순한 천마가 구 여사를 편히 이끌길 빈다.
며느리 김연주 씨가 촬영한 올초 민병돈 장군과 고 구문자 여사 부부. 사진=아시아엔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민따로’ 민병돈 장군 이야기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 15기로 1공수여단 대대장, 20사단장 등을 거친 뒤 1989년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은 인물이었다. 소신이 뚜렷해 ‘민따로’라고 불렸다.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뭐든 거부하고 따로 행동했다. 영화 ‘1987’의 배경이었던 6월 항쟁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을 출동시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는데 특전사령관이었던 그는 이를 거부했다. 되레 명령 취소 요청을 했다. 결국 군 출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다. 노태우 정권 때 특전사령관 자리에서 육사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9년 3월 21일 육군사관학교 제45기 졸업식 때 민 장군은 상관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 않고 연단에 섰다. 연설 땐 노태우 정권의 핵심 정책이었던 북방유화정책을 10분 동안 강도 높게 비판했다. 북방유화정책이 군 전체의 기강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해 벌인 일이었다. 연설을 끝나고 돌아오면서도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뒤 즉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관련 기사: [인터뷰] 민병돈 전 장군, “직언할 땐 모든 걸 버릴 각오로 해야지”) 그는 군사 정권 시절 상납 문화를 철폐하고 부하에게 따뜻하면서도 엄격했던 군인이었다. 군부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절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란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며 장병에게 자유로운 비밀 투표를 독려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하나회 핵심 인사이자 전두환계에 속했었지만 신군부의 ‘유일한 양심’으로 불려 왔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