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파 3사, 영웅을 낳다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며 방송가를 호령하던 지상파 3사. 특히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드라마들이 소위 ‘국민 드라마’라 불리며 트렌드를 선도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케이블채널, 종합편성채널에 패권을 내주고 고리타분한 드라마에 전전하는 모양새를 보여줬다. 하지만 최근 지상파 3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대중의 지지를 받는 드라마를 내놓고 명예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그 중심에 바로 소시민 영웅이 있다.
사진=SBS ‘열혈사제’ 홈페이지
SBS ‘열혈사제’가 선두주자다. 이 드라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신부 김해일(김남길 분)이다. 하지만 ‘열혈’이라는 수식어가 가리키듯 김해일은 기도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정의 구현을 위해 주먹이 먼저 나가는 인물이다.
‘열혈사제’에서 기존 단정한 사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김해일은 바람을 가르며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고, 그 사이 악당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다소 만화 같은 설정이지만, 배우 김남길을 비롯해 이하늬, 김성록, 금새록 등 주연 배우들의 호연 속에 ‘열혈사제’의 시청률은 20%에 육박한다. ‘지상파 주말극’이 중장년층을 겨냥하는 가족극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깨며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시청률 2∼3%에서 전전하던 KBS 드라마도 2TV 수목드라마 ‘닥터 프리즈너’로 상처 난 자존심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전도유망한 의사 나이제(남궁민 분)가 제 발로 교도소 의료과장이 된 후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닥터 프리즈너’에서 나이제가 숱한 영예를 뒤로하고 교도소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재벌 2세 이재환(박은석 분) 때문이다. 방송 초반 이재환은 임신을 한 장애인 부부의 차량에 위협을 가하다 결국 남편을 숨지게 만들어 공분을 샀다. 나이제가 힘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에 수감 중인 또 다른 권력자의 형 집행정지 계획을 짜는 것은 정의롭다고 볼 수는 없으나 더 큰 적을 제거하기 위한 ‘큰 틀’ 안에서 그는 충분히 시청자들의 응원을 받고 있다.
사진= KBS ‘닥터 프리즈너’ 홈페이지
MBC는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으로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왕년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유도 폭력 교사였지만 지금은 복지부동을 신념으로 삼고 일하는 6년 차 공무원 조진갑(김동욱 분). 조장풍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으로 발령 난 뒤 갑질이 몸에 밴 악덕 사업주를 응징하며 시청자들의 가려운 속을 긁어주고 있다.
유도 고수답게 조장풍은 정의 구현을 위해 물리적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임금 체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다가 뭇매를 맞는 옛 제자를 구하기 위해 발을 뻗고, 주먹을 날린다. 그의 통쾌한 액션에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그 사이 4%대로 시작한 시청률은 어느덧 6%대로 진입했다. 조장풍 역을 맡은 김동욱은 이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무려 9kg을 찌우기도 했다.
연출을 맡은 박원국 PD는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은 현실에 기반을 둔 판타지 히어로물”이라며 “시청자들이 실제 겪었을 애환이 조장풍의 활약과 잘 어우러져서 기존 작품과 차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MBC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홈페이지
# 서민이 친구가 된 영웅, 누가 있었나?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동시에 대리만족을 줘야 한다. 현실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지만 이를 해소하지 못한 대중이 드라마 속에서나마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셈이다. 이는 드라마의 흥행 공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과거에도 소시민 영웅을 내세운 드라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소설가 김홍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인간시장’이 그 시초 격이라 할 만하다.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박상원이 주연을 맡았던 장총찬은 불의 앞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으로 서민의 편에 섰다. 최근으로 오면 한류스타인 이민호와 지창욱이 각각 주인공으로 나선 드라마 ‘시티헌터’와 ‘힐러’ 역시 고난도 액션을 소화하는 현대판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들의 활동은 현실보다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두 미남 배우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잘 어우러지며 여성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다.
반면 현실 속 직업군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소명을 다함으로써 정의로운 영웅으로 부각된 경우도 있다. ‘미스 함무라비’에서는 각종 압박과 이권에서 벗어나 소신 있는 판결을 내린 판사가 영웅이었고, ‘김과장’에서는 아주 평범한 샐러리맨이지만 회사 내 갑질에 대해 일침을 놓을 수 있는 배짱과 용기를 가진 김과장이 박수를 받았다.
한 중견 드라마 제작자는 “드라마의 경우 컴퓨터그래픽 등 특수효과를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판타지 성향이 짙은 이야기와 영웅보다는 현실 속에서 맞닥뜨릴 법한 ‘인간 영웅’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라며 “그들이 갑질을 응징하는 속 시원한 대사와 액션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든다. ‘사이다 드라마’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