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탄 차가 처음 보는 길을 따라 달린다. 최 씨는 창문에 비치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낯선 풍경을 바라본다. “내려” 경찰이 팔을 잡아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부산 하단 1동 파출소. 1층 사무실을 지나쳐 2층, 3층으로 오른다. 옥탑방 같은 가건물이 보인다. 문틈 사이로 시큼한 쇠 냄새가 퍼진다.
“옷 벗어” 최인철 씨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덩치 큰 경찰관이 뒤에서 그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앞에 선 다른 경찰은 그를 밀어 넘어 뜨린다.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쪼그린 채로 무릎을 감싸 쥐게 한다. 쇠파이프가 최 씨의 무릎과 팔 사이에 들어온다.
세상이 뒤집어 진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무릎과 팔에 낀 쇠파이프가 걸리면서 최 씨의 머리가 아래쪽으로 떨어진다. 눈앞엔 경찰관들의 구둣발이, 불과 몇 초전까지 자신의 발로 딛고 서있던 바닥이 보인다.
주전자에서 쏟아지는 노란색 물이 최 씨의 코 속으로 들어온다. 겨자 냄새다. 코 속이 따갑다. 숨도 쉬지 못한다. 견딜 수가 없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낙동강에서 하나 더 했지? 낙동강에서 죽은 여자, 니가 때려 죽였지?”
그 순간 최인철 씨는 직감했다. “이곳에선 작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친구 장동익 씨와 함께 살인범이 된다.
‘낙동강변 2인조’ 최인철 씨.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 검찰 과거사위 “낙동강변 사건, 경찰 고문 있었다”
낙동강변 2인조 살인사건은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갈대숲에서 30대 여성이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시신 외에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미제 사건으로 남는 듯 했지만 1년 뒤인 1991년 전환점을 맞았다. 경찰이 ‘낙동강변 인근에서 공무원을 사칭하는 남성 2명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이들을 임의동행으로 연행하면서부터다. 경찰은 범행 수법과 장소 등이 낙동강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며 2인조를 용의자로 지목해 검찰로 송치했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1년 간 복역하다가 2013년 모범수로 특별 감형돼 출소한 이들은 “당시 경찰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허위자백이 있었다”며 무죄를 주장해 왔다.
경찰의 기소 의견에 검찰은 사형 구형, 그리고 대법원은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당시 수사기관과 사법부 모두 ‘낙동강변 2인조’가 범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 기관들의 판단에 따라 낙동강 2인조는 21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고, 지금도 ‘살인범’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족쇄에 묶여 있다.
하지만 2019년 4월 17일,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정반대의 결과를 내놨다. 과거사위는 “최인철·장동익 씨는 살인범이 아니다. 경찰은 고문으로 이들에게 허위자백을 받았고, 검찰은 이를 검증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과거사위는 최 씨와 장 씨를 비롯해 사건 관계자들과 전문가 등을 조사한 결과, 2인조가 경찰 수사과정에서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사건이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간 직후부터 재판 과정에 이르기까지 범행을 부인하며 “경찰의 물고문 등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사위는 2인조가 설명하는 고문의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객관적으로 확인한 내용과도 일치해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여기에 2인조가 경찰에 체포되기 2개월 전인 1991년 9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사례가 있다는 점 등을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과거사위는 2인조가 고문을 통해 받은 또 다른 혐의 가운데 하나인 ‘현직 경찰관 특수강도 사건’도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2인조의 살인 혐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발생하지도 않은 사건을 살인사건과 비슷하게 만들어 끼워 넣었다는 얘기다.
실제 당시 부산 중부경찰서에 근무하던 한 경찰관 A 씨는 “낙동강변 살인 사건 한 달 전인 1989년 12월 낙동강변에서 한 여성과 차에서 경치를 감상하던 중 칼을 든 괴한 2명에게 돈을 뺐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거사위 조사 결과, 사건 발생 당시 A 씨가 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르망’ 차량에 해당하는 차량번호는 없었고, 트렁크에 갇혀 비상탈출 장치를 눌러 탈출했다는 A 씨의 주장과 달리 이 장치도 없었다.
피해를 주장하는 현직 경찰관의 진술 외에 실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과거사위의 설명이다. 그밖에 과거사위는 당시 경찰이 최 씨와 장 씨에게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참고인들의 진술조서를 왜곡하고 은폐한 정황도 발견됐다고 밝혔다.
과거사위는 현직 경찰관 특수강도 사건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일요신문은 지난 2017년 4월, 르망 자동차를 수소문해 피해를 주장하는 현직 경찰관의 진술을 그대로 재현했지만 비상탈출 등은 불가능했다. 사진=문상현 기자
# 위원회 “검찰 부실수사, 2인조 고문 주장 외면”
위원회는 검찰에도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2인조가 검찰 수사과정에서부터 고문 등 가혹행위로 어쩔 수 없이 자백하였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수사 검사는 이 진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재판에 넘겼다는 이유다.
위원회는 “2인조가 고문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자백진술과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들 사이에는 여러 모순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자백진술에만 기대 수사를 진행했다”며 “특히 당시 수사검사는 국과수로부터 회신 받은 감정서의 내용조차 왜곡했다. 이는 검사의 객관의무를 저버린 것일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처벌에만 급급해 실체적 진실 발견이라는 형사소송법의 근본 원칙을 외면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이번 낙동강변 사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향후 피의자가 자백을 번복할 경우 이를 검증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강력사건의 경우 주요 증거물에 대해 기록 보존 또는 공소시효 만료까지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권고했다. 장애인 등 법률적 조력이 필요한 피조사자의 실질적인 조서 열람권 보장, 수사기록 진실성 확보 절차를 위반한 검사 및 수사관 등에 대한 징계 절차 마련 등도 함께 권고했다.
이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는 이번 위원회 발표에 대해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는 17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과거사에 대한 정리는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앞으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개선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며 “이번 조사 결과에는 2인조의 한을 풀어주는 의미와 위원회 권고 사항은 재발 방지를 위해 제도적 개선 방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편 낙동강변 2인조 사건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 소속 이정화 검사가 주도적으로 조사를 이끌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관련자들을 직접 면담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와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다
낙동강변 2인조 장동익, 최인철 씨는 지난 2017년 5월 8일 재심을 청구했다. 이번 검찰 과거사위 공식 발표로 이들의 재심 개시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앞서 낙동강변 2인조 사건 재심을 담당하는 부산지방검찰청은 법원에 “검찰 과거사위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취지의 의견을 밝혔고, 법원 역시 최근 과거사 위원회에 공식 발표 일정을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낙동강변 2인조’ 장동익 씨. 사진=진실탐사그룹 셜록 제공.
지난 4월 8일 오후, 장동익 씨는 산책을 했다. 자주 다니는 익숙한 길이지만 시각장애 1급인 그는 지인들이 한 시간이면 다녀올 거리를 두 시간에 걸쳐 걸어야 한다. 그날은 유난히 걷고 싶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날은 과거사위가 앞서의 내용을 담은 대검찰청 진상 조사단의 최종 보고서를 채택한 날이다. 그는 “이제 끝나겠구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 왔나하는 생각도 들고, 이게 기쁜건지 서러운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며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거란 막연한 생각만 해왔다. 그날이 이렇게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장 씨는 몸을 씻었다. 역시 늘 해오던 일이지만 이날 만큼은 다른 것도 씻어 낸 기분이 들었다. 그게 어떤 건지 말로 설명할 순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다고 했다. 그동안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1991년, 낙동강변 2인조가 경찰서에 처음 들어간지 무려 29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