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앞장서고 있다. 사상 초유의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로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더니, 이제는 국내 굴지의 대형 로펌도 수사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다. 법원에 이어, 변호사업계가 고심에 빠진 대목이다. 그동안 ‘불법이었지만 관행처럼 해오던 영역’들에 대해서 처벌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 관행처럼 해온 일들인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구속하고,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을 기소하는 등 판사 수십여 명을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재판에 넘긴 검찰. 그동안 ‘성역’처럼 한 차례도 조사 받은 적 없던 법원에 칼날을 겨누더니, 이제 그 칼날을 대형로펌에도 서슴없이 들이대고 있다.
국내 4대 로펌 중 한 곳인 A 로펌. 지난해부터 심심치 않게 검찰의 압수수색(임의 자료 제출 형식) 영장을 제시받아야 했던 A 로펌은 최근에는 입건될 위기에까지 놓였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변호 과정에서 의뢰인(기업) 측에게 사건 관련 증거물 폐기를 구체적으로 도와주다가 증거인멸 교사 혐의로 처벌될 상황에 놓인 것. 적극적인 변론 속에 다행히 입건이 되는 것은 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초동 일대에서는 그동안 관행처럼 해오던 변호사들의 불법 행위들이 검찰의 입건 범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초동 일대에서는 그동안 관행이었던 변호사들의 불법 행위들이 검찰의 입건 범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초동 법조타운으로 기사 내 특정 사실과 관계 없음. 일요신문DB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 2011년. 정부 집계 기준, 5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발생하고 1200여 명이 숨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2016년 처음 이뤄진 수사에서는 옥시 등 외국계 가습기 살균제 업체만 기소됐고, SK케미칼 등 국내 업체들은 처벌을 면했다.
당시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원료 물질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썼다가 재판에 넘겨졌는데, SK케미칼, 애경산업 등은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을 사용했고 이는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해명으로 수사를 피했다.
하지만 검찰이 지난해 말, 환경부로부터 가습기를 살균하는 CMIT 등에서도 유해성이 일부 검출됐다는 독성실험 연구 자료를 받으면서 올해 1월 검찰(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수사에 다시 시동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A 로펌의 증거인멸 의혹이 제기됐다.
사라졌던 애경산업 일부 자료가 해당 기업 직원의 친척 집뿐 아니라, 법률대리를 맡았던 로펌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발견된 것. 검찰은 곧바로 증거인멸에 가담한 전직 임원 두 명을 증거인멸 및 증거인멸 교사 등의 혐의로 구속했고, 이 과정에서 A 로펌이 적극적으로 증거 인멸을 지휘(교사)한 것으로 보고 로펌 대표급 변호사에 대한 입건 여부도 신중하게 검토했다. 해당 로펌이 비상에 걸렸던 것은 당연한 결과.
사건 흐름에 정통한 법조계 관계자는 “증거인멸 과정에서 로펌이 도를 넘어 관여했다고 본 검찰이 입건 여부를 고민했다”며 “기업과 로펌이 변호 과정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조력을 해도 될지를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라고 풀이했다.
# 증거 인멸 조작 ‘당연히 말해줬는데’ 어쩌지?
사실 기업들은 물론, 일반 형사 사건의 피의자(로펌 기준 의뢰인)들의 증거 인멸은 당연한 흐름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변호사들의 조언이 당연히 따라간다는 것.
압수수색 등에 대비해 증거를 사전에 없애려는 것인데, 로펌은 이를 암암리에 조언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국내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의뢰인과 계약을 맺고 나면 ‘이렇게 준비하는 게 좋다’는 얘기를 해주는데, 비공식적으로 없애야 할 자료 등을 은밀하게 일러주는 게 일반적”이라며 “요새는 다들 먼저 의뢰인이 묻기 때문에 이를 답해주지 않기도 힘들다. 관행처럼 해오던 부분들인데 이제 문제가 될 여지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의뢰인’ 홍보 스틸 컷
그러면서 그는 “검찰이 이 관행을 문제로 삼았고 입건할 경우 ‘의뢰인 변호 조력 시 증거물 처분’에 큰 기준이 될 수 있는데, 변호인으로서 문제가 될 증거에 대한 조언을 어디까지 하는 게 합법적인지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며 “작은 로펌이나 개인 법률 사무소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증거 인멸에 나설 텐데 과하게 개입해서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곧 뉴스에 등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가수 정준영 씨 사건에서는 증거 처리 및 수사기관 대응 과정에서 이미 변호사가 입건됐다. 가수 정준영 씨 변호인이 과거 정준영 씨의 황금폰 포렌식 관련, 허위 기록을 수사기관에 제출한 점이 문제가 됐다.
정준영 씨는 지난 2016년 8월 여성의 신체를 불법촬영한 혐의로 고소당했는데, 정 씨의 변호사는 “휴대전화가 파손돼 업체로부터 데이터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취지의 변호사 의견서를 냈다. 이를 토대로 경찰에서 최종 무혐의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복구가 가능했던 상황에서, 의뢰인(정준영)을 위해 ‘복구가 불가하다’는 거짓된 내용으로 문서를 만들었다가 이번 몰카 논란 속에 들통이 나며 처벌을 받게 됐다.
앞선 로펌 관계자는 “변호인은 사실 관계를 토대로만 수사기관 등에 응대해야 하는데 의뢰인에게 유리할 수 있는 취지로 거짓된 사실 관계를 수사기관에 대응하는 관행도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관행이 이제 기소는 물론, 유죄가 날 경우 변호사 라이선스까지 내놓게 될 일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로스쿨 졸업생 우후죽순 쏟아져 더 걱정”
서초동(변호사 시장) 일대에서는 ‘로스쿨 졸업생’이 쏟아지면서, 시장 내에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는 변호 조력 관행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변호사 10여 명 규모의 소형 로펌 대표변호사는 “우리 때는 사법연수원에서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변호사라고 하더라도 윤리 교육을 강하게 받았는데 반해, 이제 한 해에 1500명씩 로스쿨 출신들이 쏟아지면서 시장이 더 과열되고 먹고 살기 위해 의뢰인이 원하는 대로 하는 변호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검사나 판사 출신이 아니거나, 대형 로펌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은 변호사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변호사가 불법적인 관행으로 문제가 될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검찰 출신의 대형 로펌 변호사 역시 “한 달에 400만~500만 원도 가져가지 못하는 변호사들이 늘면서, 단순 증거 조작뿐 아니라, 회계 관련된 부분이나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도 의뢰인 입맛대로 다 해주면서 불법과 관행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변론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변호사의 조력권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기준이 바뀌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