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를 보도한 해외 언론들은 일제히 이렇게 보도했다. 이는 비단 노트르담 대성당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성당이 갖는 문화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건축학적으로는 고딕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질 만큼 위대한 기술과 장인정신이 집적된 건축물이자, 역사적으로는 지난 850년 동안 수많은 사건을 오롯이 버텨낸 인류 역사의 산 증거이기도 했다. 이런 수백 년의 인류의 역사가 한 시간여 만에 불타버리자 이를 바라보는 파리 시민은 물론이요, 전 세계 사람이 허망함을 넘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번 화재는 방화가 아닌 실화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앞으로 남은 과제는 과연 대성당을 어떤 방향으로 재건할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제는 슬픔을 넘어 희망을 이야기할 때라는 것이다.
불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 언론들은 일제히 ‘파리의 심장이 불탔다’며 화재의 충격을 전했다. AP/연합뉴스
1969년, 역사학자인 케네스 클라크는 BBC 방송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출연해서 시청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문명’이 무엇인지 쉽게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기를 바라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쉬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재가 시작된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파리의 스카이라인을 빛냈던 수백 년 된 첨탑은 허망하게 스러졌고, 이 모습을 바라보는 파리 시민들의 가슴도 무너졌다.
소방관 400여 명이 투입되어 벌인 사투 끝에 불길은 10시간 만에 완전히 진압됐다. 비록 13세기 초에 건설된 유구한 역사를 간직했던 첨탑과 지붕은 전소됐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성당 전체가 무너지는 대형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과도 같은 두 개의 종탑과 세 개의 장미창, 10개의 종들 역시 모두 무사했다. 가시면류관, 13세기 세인트 루이 왕이 착용했던 튜닉 등 유물들도 모두 무사히 옮겼다. 현재는 정밀한 안전 진단을 통해 앞으로 성당이 추가로 붕괴될 위험은 없는지 조사하고 있는 상태다.
이번 화재가 순식간에 대형 화재로 번졌던 이유는 첨탑과 지붕이 모두 참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치형 천장 전체가 함께 무너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다만 천장의 석재들이 열에 의해 약화되고 금이 갔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앞으로 세심한 점검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시당국은 밝혔다. 또한 아름답고 정교한 세 개의 장미창은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지만 강한 열과 차가운 물로 인해 ‘열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유리창을 연결하는 납이 일부 녹았을 것으로 추정돼 세심한 점검이 필요한 상태다. 장미창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2차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분리했다가 1960년대 다시 끼워넣기도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이 붕괴되면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고 있다. 이번에 무너진 첨탑은 19세기에 새로운 형태로 재건된 것이다. AP/연합뉴스
‘우리의 어머니’, 즉 ‘우리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인 노트르담 대성당은 센 강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작은 시테섬 위에 건설됐다. 1163년 루이 7세 시절 착공됐으며,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약 200년에 걸쳐 목숨을 바쳐가며 건설했다. 완공은 1345년에 이뤄졌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날로 높아지는 프랑스의 위상을 뽐내기 위해서 혁신적인 고딕 양식의 건축기법이 사용됐다. 가령 하늘로 솟아오른 아치형 천장, 화려한 선을 자랑하는 버팀목(플라잉 버트레스) 등이 그랬다. 그런가 하면 두 개의 거대한 종탑, 독특한 장미창, 수많은 조각 장식, 위압적인 석상들인 ‘가고일’은 현재 노트르담 대성당을 나타내는 주요 상징물들이다.
이번 화재로 무너진 첨탑은 13세기 초에 건설됐지만, 1786년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맞은 끝에 파손됐다가 19세기에 새로운 형태로 재건됐다. 무게만 750톤이며, 참나무에 납을 씌워 만들었다. 한때 파리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지붕의 목조 구조를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1160년께 베어진 것들로, 약 1만 3000그루의 참나무가 사용됐다.
매년 에펠탑보다 두 배가량 많은 1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갈 정도로 파리를 대표하는 명소이지만, 무엇보다 이곳은 파리 시민들에게는 심장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프랑스 역사의 큰 사건들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만큼 붕괴나 파괴 위험도 많았던 험난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48년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는 개신교도들의 폭동으로 인해 성당의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었다.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조각상 다수가 파괴됐던 것이다. 또한 1790년대 프랑스 혁명이 한창일 때는 그야말로 대성당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었다. 당시 봉기를 일으킨 민중세력들은 왕권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모든 억압의 상징물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교회의 권위적인 상징물들이 약탈되고 파손됐다. 가령 성당 정면을 장식하고 있던 석조 조각상 28개가 분해되어 목이 잘리는 수난을 겪었다. 이 조각상들이 성서 속의 인물들이 아니라 프랑스 왕들을 상징한다는 이유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시면류관(위)과 세 개의 장미창은 모두 무사했다.
종탑의 종은 녹여서 대포알로 만들었으며, 대성당의 명칭을 ‘이성의 사원’으로 개명하고 계몽주의의 이상을 촉진했다. 그러는 동안 유물들은 계속 훼손됐고, 대부분이 약탈당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무신론 열풍은 곧 수그러들었고, 대성당은 식량창고로 쓰이면서 점점 더 황폐해져갔다.
대성당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시대 때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무렵, 대성당은 완전히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빈틈이 없었던 나폴레옹은 대성당의 중요성을 알아챘다. 그리고 1804년,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황제에 오른 후 성당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시대가 저물면서 대성당은 다시 관심 밖으로 물러났다. 황폐해진 성당은 파리 시민들에게는 낡아빠진 흉물에 불과했다. 헐릴 위기에 처했던 대성당을 구한 결정적인 인물은 소설가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고통스럽게 방치되어 있던 대성당을 다시 사랑받는 파리의 랜드마크로 바꾸었다. 바로 위대한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를 통해서였다.
대성당을 향한 애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집필한 이 소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독창성, 프랑스의 자존심, 프랑스의 역사, 유럽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소설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대성당은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소설에 감동받은 루이 필립 왕은 성당을 새롭게 복원하도록 지시했으며, 1860년대 건축가인 유진 바이올렛-레-두크의 지도 아래 대대적인 개조가 이루어졌다.
헐릴 위기에 처한 대성당을 구한 인물은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를 쓴 빅토르 위고였다.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한 장면.
1944년 8월, 전쟁이 끝나고 파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특별 미사가 열렸던 곳도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드골 장군이 파리에 입성해서 파리 시민들에게 처음 연설을 한 곳도 대성당 앞이었며, 훗날 대통령이 된 드골의 장례식 역시 대성당에서 거행됐다.
이처럼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 시민들에게는 가톨릭 교회 그 이상이었다. 예수회 사제 신부인 제임스 마틴은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동시에 프랑스 사람들 모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대성당은 문명의 중심적인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2017년 ‘퓨 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프랑스 성인의 60%가 가톨릭 신자며, 그 수는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프랑스는 가톨릭의 거점이자 많은 순례자들의 행선지로 남아 있다.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 때문이다. 이들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은 반드시 방문해야 할 필수적인 성지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과연 대성당의 복원을 어떤 방향으로 하느냐다. 대성당을 화재 이전과 똑같이 복원할지, 아니면 좀더 21세기에 걸맞은 창의적인 설계로 재건할지 여부다. 사실 지금까지 대성당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여러 차례 변화를 거듭해왔다. 가령 대성당의 첨탑은 19세기에야 비로소 추가된 것이었다.
건축역사학자인 조나선 포일은 “대성당은 13세기 초 이후 정지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이번에 파괴된 대성당은 사실 완벽하게 보존돼 왔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대성당의 외관과 내부는 끊임없이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이와 관련, 건축가인 존 버튼은 “우리는 800년 전의 건축물처럼 보이는 복제품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그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것 역시 모두 건물을 이루는 역사의 일부분이다”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영화 ‘비포 선셋’에서 예언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운명 누리꾼들 사이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의 미래를 예고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된 영화 ‘비포 선셋’. 노트르담 대성당은 서구 문명의 상징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 문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는 세속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이 대성당을 알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이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의 미래를 예고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바로 2004년작인 영화 ‘비포 선셋’이다. 에던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비엔나에서 로맨틱한 하루를 보낸 남녀 주인공이 9년 후 파리에서 재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화재가 발생하자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놀라울 정도로 대성당의 미래를 예견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은 남녀 주인공이 유람선을 타고 센 강을 건너면서 노트르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제시는 대성당을 흘끗 쳐다보면서 셀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 들은 얘긴데,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이 철수를 하면서 대성당을 폭파하도록 작전 명령을 내렸다는 거야. 독일군은 폭파 스위치를 누를 한 명을 남겨 두어야 했지. 하지만 그 임무를 맡은 군인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어. 그저 앉아서는 그 건축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지. 나중에 연합군이 도착했을 때 폭탄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 스위치를 켜지 않은 채. 똑같은 장치들이 사크레쾨르 대성당, 에펠탑, 그리고 몇몇 다른 장소들에서도 발견됐지.” 이에 셀린은 “그래, 아름다운 이야기네. 하지만 노트르담도 언젠가는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야 해. 저기에 예전에는 다른 교회나 성당이 있었거든. 바로 저 자리에”라고 말한다. 이에 누리꾼들은 15년 전 영화 속의 비극적인 예측(혹은 우연의 일치)이 담긴 영상을 공유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은 자신의 용단으로 대성당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제시가 말한 이 이야기는 실화일까. 현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대성당을 차마 폭파하지 못했던 이 인물은 나치 시절 장군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전에 “나는 파리의 구세주다”라고 주장했던 콜티츠는 2차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용단 덕분에 파리가 무사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철수 직전 그는 히틀러로부터 파리의 모든 역사적 기념물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파리를 ‘돌무더기’로 만들라”는 명령이 전보를 통해 전달됐다. 1951년 집필한 자서전에서 그는 “하지만 나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히틀러가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현재 프랑스는 이런 주장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는 상태. 그보다는 레지스탕스가 독일군에 대항하여 2000개의 총으로 파리를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콜티츠의 아들은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원흉이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반면 다수의 역사가들은 현재 콜티츠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콜티츠가 히틀러의 명령대로 도시를 파괴할 정도의 병력, 물자, 공군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