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김호철 감독. 사진=대한민국배구협회
[일요신문] 순항하던 대한민국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이 때 아닌 감독의 ‘먹튀 논란’으로 표류하게 됐다.
김호철 대표팀 감독의 거취 문제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3월 V리그가 마무리 된 이후 김세진 OK저축은행 감독이 사의를 표명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후임 감독으로는 석진욱 수석코치가 거론됐다. 석 코치는 2013년 팀 창단 당시부터 김 감독과 함께 팀을 이끌어 왔다. 2014-2015 시즌부터 V리그 2연패를 달성하며 신생팀 돌풍의 한 축을 맡기도 했다. 배구계 다수 인사들이 ‘차기 감독’으로 석 코치의 승진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OK저축은행의 감독 선임 작업이 길어졌다. FA 협상,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등 중요 일정을 앞둔 상황에서도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한국전력, 여자부 IBK 기업은행 등이 새 감독을 발표한 것과 대조됐다.
급기야 OK저축은행의 감독 선임 과정에서 김호철 감독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석진욱 수석코치의 내부 승격 유력’이라는 언론 보도까지 나온 상황서 ‘거물’이 끼어든 것이다.
구단이 새 감독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사를 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김호철 감독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김호철 감독은 현재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고 있다. 대표팀은 지난해 3월 전임 감독제를 도입했다. 초대 전임 사령탑으로 선임된 김 감독에게 배구협회는 4년이 넘는 계약기간(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을 안겼다.
전임 감독제 도입은 배구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간 단기 감독로 운영되던 대표팀 체제를 벗어던지고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단기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팀을 운영하기 힘들었고, 협회의 재정적 문제로 처우가 좋지도 못했다. 과거 주요 대회를 코앞에 둔 대표팀 감독이 프로팀으로 적을 옮기는 사례도 있었다. 이에 협회는 전임 감독에게 장기계약과 함께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도 보장했다. 김 감독의 연봉은 약 1억 원 내외로 알려졌다. ‘계약기간 중 프로팀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합의도 있었다.
하지만 김호철 감독과 사령탑이 공석인 OK저축은행의 접촉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OK저축은행 새 감독으로 김 감독이 거론되던 초기, 그는 “그런 계획 없다.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며 부인했다.
그런데 양 측이 협상테이블에 앉으며 연봉 등도 논의한 것이 밝혀졌다. 정확한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대표팀의 몇 배가 넘는 연봉이 제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OK저축은행 측은 ‘먼저 의사를 전달 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김 감독이 먼저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표팀에 몸을 담고 있는 그의 손을 맞잡으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OK저축은행은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위해 배구협회에 지원금을 지급하는 V리그 13개 구단의 일원이다.
사건은 김 감독이 협상을 중단하고 대표팀에 남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배구협회 내 징계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협회 남자경기력향상위원회가 김 감독을 스포츠공정위원회(상벌위원회)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오는 21일까지 대학배구 올스타전, 문체부장관기 생활체육 대회 등의 일정이 잡혀있는 만큼 그 이후로 공정위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협회가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면 해임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지난해 5월 선수들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섰던 김호철 감독(맨 오른쪽)과 차해원 감독(맨 왼쪽). 연합뉴스
배구뿐만 아니라 야구, 농구 대표팀도 전임감독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입한 바 있다. 각 종목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 출신 지도자가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이들도 ‘전임 감독 잔혹사’를 피하지는 못했다.
야구대표팀은 지난 2017년 7월 초대 전임감독으로 선동열 감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또한 2020 도쿄 올림픽까지였던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첫 목표였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지만 그 과정에서 선수선발 논란과 예선전 대만에게 당한 패배가 문제가 됐다. 2018 국정감사에서 증인을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농구 대표팀 또한 오랜 기간 전임 감독제의 필요성이 대두돼 왔다. ‘직전 시즌 KBL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을 맡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지만 많은 감독들이 겸업에 힘겨움을 토로했다.
농구 월드컵 예선 방식의 변경으로 프로농구 시즌 중에도 국가대표 경기가 열리게 되자 ‘파트타임식 감독 운영’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이에 농구협회는 허재 감독을 2016년 7월 전임 감독으로 낙점했다.
‘농구 대통령’ 허재 감독 역시 계약된 임기를 채우지는 못했다. 아시안게임 준비 과정에서 ‘혈연 농구’ 논란이 일었고, 대회 결과마저 동메달에 그치며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