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을 둘러싸고 여야4당과 자유한국당이 충돌했다. 사진은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등. 박은숙 기자
이날의 혼란은 여야 4당이 선거제, 공수처 도입, 검경수사권 조정을 패스트트랙에 태우기로 합의하면서 벌어졌다. 패스트트랙(fast track)은 말 그대로 빠른 궤도를 뜻한다. 보통 공항의 보안검색과 입국심사에서 빠르게 처리해주는 절차를 뜻한다. 국회는 2012년 논란 끝에 패스트트랙을 도입했다.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되면 상임위원회(최장 180일) 법사위원회(최장 90일) 본회의 부의(최장 60일)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한다. 기간 내에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법안이 통과되려면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의원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다.
# 4당 셈법 다른 속셈
패스트트랙 정국이 사실상 시작됐지만 향후 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1야당 자유한국당의 강한 반발과는 별개로 손을 잡은 여야4당 내부 셈법도 복잡한 이유에서다. 본회의 투표로 가는 여정까지 과연 이들의 ‘오월동주’가 계속될지가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정의당 관계자는 “일단 패스트트랙에 태우기 위해 각 당이 조금씩 양보한 상황”이라면서 “민감한 사안들이다 보니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치면서 각 당 입장이 또 충돌할 수 있다”고 점쳤다.
민주당과 한 배를 탄 야당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다. 3당의 방점은 선거제 개편에 찍혀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제 개편을 통해 소수 정당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자 현 정부 핵심 개혁 과제인 공수처 도입에 더 공을 들인다. 이는 양측의 ‘빅딜’이 이뤄질 수 있었던 동력으로 작용했다. 서로 ‘윈윈’을 한 셈이다.
이처럼 셈법이 다르다보니 묘한 긴장감도 감지된다. 과연 본회의 투표에서 ‘동맹’이 유지될 수 있느냐와 관련이 깊다. 야3당은 본회의 투표에서 민주당 이탈표를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서의 정의당 관계자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본회의까지의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야3당이 모두 찬성해도 민주당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선거제 개편은 물 건너간다. 당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찬성 표결을 독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평화당 의원은 “선거제 도입으로 지역구가 줄어들게 생겼다. 밥그릇 문제다. 민주당뿐 아니라 기존 의원들 누가 반대표를 던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면서 “민주당으로선 지금의 거대 양당구도를 더 선호할 수 있다. 선거제에 있어선 자유한국당과 비슷한 입장일 것 같다. 공수처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지만 과연 찬성표를 던질지 의문”이라고 했다. 바른미래당 의원도 “지금 야3당 사이에선 ‘민주당에 이용만 당하고 팽 당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확산 중”이라고 귀띔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의원실을 점거하자 창문 사이로 인터뷰를 하는 채이배 의원. 박은숙 기자
정치권에서 자유한국당이 이렇게까지 나올 것을 예상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필요성에 대해선 자유한국당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지난해 12월 15일엔 나경원 원내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구체적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는 합의사항에 서명하기도 했다. 공수처 역시 무소불위의 검찰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점을 한국당 의원 다수가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절차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물리적 충돌’에서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명분도 찾기 힘들다. 2012년 마련된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실시된 패스트트랙은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더군다나 이 법은 당시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비대위원장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강하게 추진했었다. 패스트트랙에 올린 후에도 충분히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탄전까지 벌인 것은 국회법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난이다.
자유한국당 대응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는 배경이다. 자유한국당 중진의원은 “어차피 패스트트랙은 막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까지 이 판을 깨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그는 “가장 걱정되는 것은 한국당 고립이다. 야4당이 힘을 합쳐 국회 주도권을 장악하면 한국당이 설 자리는 없다”면서 “우리가 야3당을 ‘민주당 2중대’라고 규정하고 공격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현 패스트트랙 정국을 촛불세력과 적폐세력 간 대결로 지칭하는 것과도 맥락이 비슷하다. 대선 승리 공식을 총선, 그리고 차기 대선으로까지 확장시키겠다는 노림수다. 한 친문 의원은 “선거제와 공수처뿐 아니라 앞으로 개혁 입법이 줄줄이 남아 있다. 어차피 한국당 협조는 받기 힘들어 보인다면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다. 또 다른 민주당 의원 역시 “한국당이 이렇게 나오면 나올수록 오히려 다음 총선과 대선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당 의원들은 이러한 구도가 선거제 논의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밥그릇’ 문제 때문이다. 지역구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칫 여야4당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날 수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한국당 중진 의원은 “황교안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는 이런 움직임을 ‘진보 장기집권 플랜’의 일환으로 본다”면서 “우리가 패스트트랙 절차를 힘으로라도 막는 것은 이런 절박함 때문”이라고 하소연했다.
# 바른미래당 내분, 정계개편 신호탄 되나
패스트트랙 정국 도화선은 바른미래당이 지폈다. 오신환 권은희 의원의 사보임, 채이배 의원 감금 등 주요 뉴스는 바른미래당 의원들이 장식했다. 패스트트랙 1차 관문인 정개특위(민주 8명 바른미래 2명 민주평화 1명 정의 1명)와 사개특위(민주 8명 바른미래 2명 평화 1명)를 통과하려면 18명 위원 중 11명 이상 찬성을 해야 한다. 바른미래당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셈이다. 사개특위의 경우 바른미래당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부결된다. 패스트트랙 합의를 주도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사보임이라는 강수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바른미래당은 거센 내홍에 휩싸였다. 사실상 ‘분당 열차’를 탔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정치 전문가들은 “어차피 총선 전에 깨질 당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바른미래당은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모여 있다. 유승민계, 안철수계, 호남계다. ‘당권파’인 손학규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가 이끄는 호남계가 패스트트랙 찬성파다. 반면, 유승민계는 패스트트랙에 강력 반발하며 손학규-김관영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관망하던 안철수계는 유승민계와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둘로 쪼개진 바른미래당의 의원들은 서로를 향해 당을 나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4월 25일 유승민 의원은 “손학규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는 더이상 당을 끌고 갈 자격이 없으니 즉각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손학규 대표 최측근 이찬열 의원은 “유승민 의원은 꼭두각시 데리고 한국당으로 돌아가라”고 맞섰다. 정치권에선 독일에 머물고 있는 안철수 전 의원 스탠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안 전 의원은 측근들로부터 현 상황을 실시간 보고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귀국설까지 흘러나온다.
이는 보수 빅텐트, 제3지대 신당, 민주평화당과의 합당 등 각종 정계개편 시나리오 분출로 이어졌다. 3개 계파 의원들이 ‘헤쳐 모여식’ 집단행동에 나설 경우다. 벌써부터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 반대파를 향해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는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평화당 역시 바른미래당 호남계 영입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바른미래당 한 의원은 “이번 사태로 당이 깨지진 않을 것이다. 당 대 당 통합이 총선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탈당하는 의원들은 없을 것”이라면서 “그동안 불협화음을 냈던 안철수계와 유승민계가 언제까지 한목소리를 낼지도 변수”라고 설명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공수처안에 자신들은 기소권 제외…국회의원 셀프 특혜 논란 패스트트랙을 둘러싸고 빚어진 혼란에 대해 정치권에선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야 4당이 처리하기로 내놓은 안건에 대해 얼마나 꼼꼼한 검토가 이뤄지고 있는지 여부다. 선거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공수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 모두 하나같이 중대하고 휘발성이 큰 사안이다. 여야 4당 합의안에 따르면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은 현재 253명에서 225명으로 줄어든다. 지역구 축소는 의원들의 생존문제와 직결돼 있다. 향후 조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자유한국당은 물론 야3당 내부에서도 지역구 축소와 관련된 물밑 눈치 싸움이 한창이다. 정치권에선 ‘게리맨더링’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게리맨더링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자의적으로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을 뜻한다. 축소된 지역구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두될 전망이다. 이만희 한국당 대변인은 패스트트랙 합의 직후 “친여 정당들의 세를 키우려는 선거제 조작, 문재인식 게리맨더링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공수처에 제한된 기소권을 부여한 대목도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 친인척을 포함한 각 부처 장·차관, 국회의원 등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특히 국회의원들이 빠진 것을 두고는 ‘셀프 특혜’라는 비난이 높다. ‘김영란법’ 때도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항을 빼고 통과시킨 바 있다. 동진서 기자 |
‘뜨거운 감자’ 사보임 법적 문제 따져보니… 문희상 국회의장이 4월 25일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 바른미래당 간사인 오신환 의원 사보임 안을 승인했다. 패스트트랙 처리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오 의원이 사개특위에서 반대표를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당이 선수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일부 의원 등이 오 의원 사보임을 막기 위해 집단행동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보임 반대파 의원들이 국회 7층 의사국을 점거하자 바른미래당 지도부는 오 의원 사보임 신청서를 국회 의사과에 팩스로 접수했다. 전날 한국당 의원들과의 충돌로 여의도 인근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던 문희상 국회의장은 병원에서 사보임계를 결재했다. 서류 제출부터 결재까지 1시간 30분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한국당은 오 의원 사보임 신청서가 결재된 것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 청구 및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하기로 했다. 당 법률지원단장인 최교일 의원은 “오 의원에 대한 사보임을 허가한 국회의장의 처분은 국회법 제48조 6항을 위반해 무효”라고 주장했다. 국회법 제48조 6항은 ‘위원을 개선할 때 임시회의 경우에는 회기 중에 개선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개선은 새롭게 선임한다는 의미다. 최 의원은 “국회법 규정은 너무도 명백하게 임시회 중에 사보임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면서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회법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해 사보임 허가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 법률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문 의장 측은 “교섭단체 원내대표의 소속 의원 사보임 신청을 불허한 사례가 거의 없다”면서 “그간의 관행에 따라 결재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법에 ‘부득이한 사유로 의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단서조항이 있다는 얘기다. 이미 지난 2002년 한나라당 시절 당시 김홍신 전 의원이 이번과 비슷한 문제로 헌재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적이 있다. 당시 헌재는 상임위원회 위원 선임 또는 해임은 교섭단체 대표 또는 국회의장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권석창 전 한국당 의원은 “원내대표가 국회의원 본인 의사에 반해 사보임 시키는 것은 초유의 사태”라며 “의장은 그동안 원내대표가 요청하는 사보임은 승인해주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는 해당 의원도 사보임에 동의했기 때문에 승인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상임위에서 국회의원이 당론에 반대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원내대표 마음대로 사임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