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 당시 한 토론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문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한 19대 총선에서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를 띄운 새누리당(152석)이 압승했다. ‘제2의 노풍(노무현 바람)’을 예고한 문 대통령의 등장과 레임덕에 시달린 이명박(MB) 정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 등으로 새누리당의 참패를 예상했지만, 뚜껑을 연 결과는 민주통합당(127석)의 패배였다. 부산·경남·울산(PK) 탈환을 외친 문 대통령은 이 지역에서 3곳을 얻는 데 그쳤다. 친노(친노무현)계 관계자는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는 충격으로 다들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었다”고 회고했다.
20대 총선 결과는 정반대였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0대 총선을 1년여 앞두고 문 대통령을 전격 등판시켰다. 2012년 대선 패배의 원인이었던 ‘검증’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고 ‘당 대표→대권 후보→대권 고지’를 차례로 밟겠다는 시나리오였다. 문 대통령 측근은 이와 관련해 “친문(친문재인)계 내부에서도 당 대표 경선 출마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실패한 대표는 대권에 성공할 수 없다’는 논리가 힘을 받았다”고 말했다.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호’가 출범한 내막이다.
하지만 대권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안철수 전 의원을 필두로 한 비문(비문재인계)의 ‘문재인 흔들기’가 노골화됐다. 문 대통령은 야권발 원심력을 막기 위한 조치로 ‘대표직 사퇴→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를 띄웠다. 김종인 비대위를 앞세운 친문계의 중도층 공략은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총선 직전 “새누리당이 최대 180석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더불어민주당(123석)이 새누리당(122석)을 제치고 16년 만에 여소야대를 이뤘다.
세 번째 맞수 대결은 임박했다. 그 중심에는 박근혜 석방설이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석방설은 정치공학적 셈법의 산물이다. 박 전 대통령 측이 신청한 형집행정지를 제외한 보석과 사면, 가석방 등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선 보석은 미결수를 대상으로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공천개입 혐의로 이미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사면은 형 확정된 자를 대상으로 한다.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개입 관련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상납 받은 혐의에 대한 항소심 재판도 마찬가지다. 형기의 3분의 1을 채워야 하는 가석방도 불가능하다. 박근혜 석방설은 애초부터 현실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다.
다만 ‘설’ 자체만으로 파급력은 크다. 보수진영에선 보면 ‘샤이 보수(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보수 유권자)’를 깨울 도화선이자, 보수대통합의 촉매제다. 하지만 보수진영이 강성 친박(친박근혜)계와 중도 비박(비박근혜)계로 쪼개질 가능성도 있다. ‘보수의 고립’은 여권으로선 최상의 시나리오다. 박근혜 석방설이 ‘양날의 검’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런데도 박근혜 석방설이 보수진영 내부에서 분출하는 것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을 앞세워 힘을 키우려는 친박계와 박 전 대통령 고정 지지층을 끌어안으려는 비박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다. 비박계인 김무성 한국당 의원도 4월 23일 바른정당 출신 복당파 의원 22명에게 ‘박근혜 구명’ 서한을 보냈다. 김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을 오랜 세월 지켜봤지만, 스스로 부정을 저지를 성품은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보수대통합에 시동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12월 11일 원내사령탑에 오른 뒤 “박근혜 석방결의안은 과거에 발목 잡히는 것”이라고 한발 뺀 바 있다. 이에 보수논객으로 활동하는 정두언 전 의원은 “친박계가 기세등등한데 박근혜를 끌어들일 일이 뭐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박근혜 석방설은 여야가 21대 총선 체제로 전환한 올해 4월 들어 급부상했다. 인적 청산 대상으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 일부 중진 의원들이 이를 띄우면서 박근혜 석방설은 더욱 확산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보수진영이) 단기적으로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진영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석방설은 ‘탄핵 프레임’이 다시 작동하는 시계추다. 21대 총선 구도를 2017년 5·9 대선 구도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하락 국면인 상황에서 자칫 ‘반대 프레임’ 덫에 빠질 수도 있다. 과거 제1야당 때의 구태를 답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권 내부 전략통들은 그간 ‘박근혜 변수’가 차기 총선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했다. 일각에선 박근혜 석방을 올해 하느니, 내년 총선 직전에 하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총선 막판 핵심 변수가 ‘중도층 잡기’인 만큼, 박근혜 석방 등을 통해 산토끼 잡기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는 한국당이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다. 내년 총선 직전 박근혜 석방이 현실화하면, 보수진영은 이른바 빅텐트 우산을 치기도 전에 이합집산만 하다가 선거를 치를 공산이 크다. 친박계 중진 의원은 “(올해 석방을 위한) 당의 적극적인 액션 플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석방 공론화에 한때 신중하던 황교안 한국당 대표도 “여성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계신 점을 감안해 국민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합세했다. 이에 대해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강경 친박 세력을 솎아내기 위한 분리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범보수진영조차 박근혜 석방을 놓고 갈라치기 전술을 전개하는 셈이다.
관전 포인트는 문 대통령의 결단 여부 및 총선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 전제조건은 박 전 대통령의 사면 요건 충족인 ‘형 확정’이다. 국정농단 상고심은 이르면 5월 중 선고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올해 들어서만 네 차례(2월 21일·3월 21일과 28일·4월 18일)나 법리 검토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복수 회의는 이례적이다. 통상적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한 달에 한 번 선고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5월 선고설에 힘이 실린다.
야권 중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세 개의 재판) 형이 마무리되는 순간, 문 대통령의 고민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전 대통령이 사면 요건을 충족하면, 문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내부에서도 주판알을 튕기면서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이란 의미다. 이 경우 한국당이 불을 지핀 박근혜 석방설은 여권 전반으로 퍼지면서 총선 공천 정국을 뒤흔들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이 연일 극우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한때 선을 그었던 태극기부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재인 대 박근혜’ 대결의 변수로는 ▲대통령 지지율 ▲보수대통합 등 야권발 정계개편 ▲샤이 보수 등이 꼽힌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심리적 마지노선인 40% 선 유지 여부가 관건이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둘러싼 ‘여야 4당 대 한국당’ 구도는 총선발 새판 짜기의 막을 올렸다. 보수발 정계개편의 신호탄으로 여겨진 이언주 의원의 탈당은 인위적인 정계개편의 불씨를 잡아당겼다. 이에 따라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타오를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잡는 쪽이 총선 초반 승기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21대 총선 변수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현직 대통령 구도와 함께 차기 대권주자 간 별들의 전쟁이 펼쳐진다. 여권에선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이, 야권에선 황교안 한국당 대표, 안철수 전 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이 총출동할 것으로 보인다. 21대 총선은 ‘문재인 대 박근혜’ 구도뿐 아니라 차기 대권주자들이 가세한 대선 삼국지로 치러진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