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당시 이 사건은 피해자들의 고모가 강하게 부인하며 대중들에게 언니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세상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리고 고모와 이웃들, 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사 등의 증언으로 사건의 내막이 드러났다. 자매의 계모가 자매를 고문 수준으로 학대해 왔으며, 동생의 사망 역시 계모의 폭행이 직접 원인이었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언니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한 것이었다.
실제 사건인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어린 의뢰인’ 역시 사건의 큰 줄기를 그대로 따라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 사건에선 ‘어린 의뢰인’의 결백을 믿어줄 가족과 그를 위해 증언해 줄 이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의뢰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로 머물며 결국 이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른들이 다빈이의 죽고 사는 것엔 관심이 없었구나”라는 정엽의 대사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머리를 아프게 울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
유선,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29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어린 의뢰인’ 시사회에 참석한 장규성 감독은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자문했다. 그 때 생각한 것이 ‘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모란, 어른들이란. 그런 개념이 없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라는 것”이라며 “어른들이라면, 주변에 이런 일이 있을 때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시길, 그런 작은 바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며 영화 제작 의도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는 크게 세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만사 귀찮고 목적의식 없이 살던 ‘귀차니스트’ 변호사 겸 아동복지사 정엽(이동휘 분), 계모로부터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받지만 어른들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결국 동생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는 열 살 소녀 다빈(최명빈 분). 그리고 ‘분노조절장애 사이코패스’ 계모로 다빈과 명준(이주원 분) 남매를 지독하게 학대하는 계모 지숙(유선 분)이다.
영화의 명암 대비는 훌륭하다. 마땅한 로펌 자리를 찾지 못해 겸사겸사 따둔 아동복지사 자격증을 이용해 지역 아동 복지사로 잠깐 일하던 정엽과 다빈 남매의 즐거운 한때는 낮을 배경으로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빈 남매가 지숙과 함께 할 때는 같은 시간 배경 속에서도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로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아역 최명빈.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장 감독은 이에 대해 “드라마의 감정선과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관객들의 시선이 정엽을 따라가길 바랐다”며 “아이의 감정이 초반과 중반, 그리고 마지막까지 변하는 모습, 아이의 진심을 몰라주는 어른들로 인해 이 아이가 혼자 괴로워하는 장면들에 비중을 많이 둬서 연출을 했다”고 설명했다.
제작 과정에서 밝힌 뚜렷한 명암 대비만큼이나 배우들의 감정도 굴곡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극중 10살, 7살의 어린 아이들을 사망에 이를 정도로 학대하는 역을 맡은 배우 유선의 경우는 아이들보다 오히려 본인의 트라우마가 더 큰 것처럼 보였다.
이날 시사회에 참석한 유선은 “아이들을 가해하는 장면을 찍을 땐 전날부터 마음이 무거웠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어 “아이들도 배우지만 어리기 때문에 연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쓰였다. ‘컷’ 하는 순간 제 자아로 돌아오면서 힘겨움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아역 배우들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촬영에 있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됐다. ‘컷’ 소리가 나면 아이들의 긴장감과 트라우마를 풀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가 있었다고 했다. 이동휘였다.
영화 ‘어린 의뢰인’ 스틸컷.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동휘는 “아이들이 정말 기발한 넌센스 퀴즈를 저한테 촬영 중간마다 내곤 했는데 그걸 잘 맞춰서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주력했다”며 “못 맞췄던 퀴즈 중에 ‘소금의 유통기한이 뭘까요?’ 라는 게 있었는데 정답이 천일염이더라”고 말해 시사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두 아역배우가 번갈아가며 100개가 넘는 퀴즈를 내 촬영 기간 내내 심심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동휘는 극중 ‘귀차니즘’을 인간의 형태로 빚어놓은 것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런 그가 다빈이를 만난 뒤부터 점점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면서, 끝내 관객들이 실제 사건을 두고 피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끌어낸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 ‘정엽’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다소 작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 한 마디가 더욱 빛나는 것은 영화 속 악역에게 ‘납득할 만한 사연’이 부여되지 않은 덕도 있다. 장 감독은 지숙의 과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지숙에게 특별한 개연성을 주고 싶지 않았다. 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라며 “마지막에 반론을 하긴 하지만 그를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준 유선의 열연 덕에 영화 ‘어린 의뢰인’ 속 학대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다고 느낄 관객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은 그보다 더 끔찍했고, 그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전국에 아동학대방지 시민운동을 일어나게 한 하나의 구심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6년, 서서히 잊히고 있는 사건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는 것에서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아역 배우들의 열연은 ‘미쳤다’는 말 외엔 감히 표현할 수 없다. 두 베테랑 배우 사이에서 절대 묻히지 않는 존재감을 펼친 그들의 114분은, 영화를 선택한 관객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5월 22일 개봉.
김태원 기자 dea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