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정국에서 드러난 나다르크(나경원+잔다르크)의 현주소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연일 보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당 지지율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2004년 17대 총선과 2012년 19대 총선 직전 당을 구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흡사하다. 단기적으로 보면 나 의원의 ‘뼛속까지 보수’ 행보는 꽃놀이패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당의 외곽 점유율이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서는 질 수 있다는 얘기다.
나경원 원대대표. 이종현 기자
그야말로 연타였다. ‘문재인 대통령=김정은 북한 수석대변인’ 발언으로 샤이 보수(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성향을 숨기는 보수 지지층) 결집의 도화선을 만든 나 원내대표가 빠루(쇠지렛대)를 들고 패스트트랙 정국을 주도했다. 나 원내대표는 4월 26일 국회 본청 701호 앞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한 손에 빠루를 들고 “극악무도한 여당, 극악무도한 정부, 극악무도한 청와대에 대해 우리의 의지를 가열차게”라고 외쳤다.
‘빠루를 든 얼음공주’. 21대 총선을 1년여 앞둔 2019년 보수진영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얼음공주’는 나 원내대표가 2006∼2008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변인 시절 차가운 논리로 논평하면서 붙은 애칭이다. ‘얼짱(얼굴+최고라는 의미의 짱 합성어) 경원’, ‘원더우먼’ 등으로도 불렸다. 보수진영의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히면서 선거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지원 유세가 쇄도해서다.
3수 끝에 지난해 12월 11일 한국당 원내대표에 오른 직후에는 ‘나다르크’로 변신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빠루를 든 나 원내대표를 향해 “지금 좀 미친 것 같다”, “영화를 찍는 추악한 나다르크”라고 힐난했지만, 나 원내대표의 원맨쇼로 한국당 지지율은 민주당을 바짝 추격했다. 나 원내대표의 연타는 취임 후 계속됐던 실정을 한 번에 뒤집으려는 국면전환용 승부수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나 원내대표가 ‘문 대통령=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을 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대해 “원내대표로서의 존재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 욕구도 개입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태우발 청와대 특별감찰반 논란 당시 국회 운영위원회로 소환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승부는 소문난 잔치에 불과했다. 조해주(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에 반발해 택한 릴레이 단식은 ‘웰빙 단식’이라고 조롱받았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나 원내대표가 김태우·신재민·손혜원 사건에서 건진 게 별로 없다”고 평가 절하했다. 나 원내대표가 강경 보수의 아이콘으로 대전환을 시도한 것도 이 같은 비판이 불거진 직후다.
한국당은 급기야 승리의 추억이 담긴 ‘천막당사 농성’ 카드까지 만지작거렸다. 한국당 관계자는 “좌파독재 정치의 배후인 문 대통령과 광장에서 싸우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불허 방침과 역풍 우려로 당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지는 미지수지만, 현실화한다면 2004년 17대 총선 이후 15년 만에 전국적 투쟁의 서막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당 구원투수로 나섰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불법 대선자금 수수 의혹 등으로 ‘차떼기당’ 사태가 맞물리자, 여의도 당사를 전격적으로 처분하고 84일간 여의도 공원 맞은편에 천막당사를 쳤다.
박 전 대통령의 승부수는 통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한나라당(현 한국당)이 50석 안팎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121석을 건지면서 난파 위기에 처한 당을 구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천막당사 효과를 본 박 전 대통령은 2005년 12월 참여정부의 사학법 개정안 추진에 반발, 4개월간 장외집회를 통해 입법을 무산시켰다. 한국당의 천막당사는 황교안 대표의 의중이 반영됐지만, 대규모 장외투쟁 정국으로 이끈 것은 나 원내대표였다.
또한 황 대표의 정치 경험은 석 달 남짓에 불과, 나 원내대표에 대한 의존도는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나 원내대표가 ‘제2의 박근혜’로 재부상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나 원내대표가 천막당사 정국에서도 샤이 보수를 일깨우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다면, 황 대표와 함께 보수진영의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를 형성할 전망이다. 박 전 대통령도 17대 총선 승리를 기점으로 보수의 구세주로 떠올랐다. 이후 2006년 5·31 지방선거까지 승리하면서 ‘선거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나 원내대표도 한때 ‘차세대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다. 그는 이명박(MB) 정부 때인 2011년 7·4 전당대회에서 자력으로 3위에 오르면서 여풍을 주도했다.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최종 1∼2위를 차지한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와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등을 제쳤다. 나 원내대표의 선전으로 당시 일부 친이(친이명박)계 지지를 받은 원희룡 제주지사와 소장파 대표였던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는 4∼5위로 밀려났다. 나 원내대표는 그해 6월 24일 대구 시민체육관에서 개최한 ‘당 대표 경선 후보 비전 발표회’에서 “‘선거의 여왕 2’라는 애칭을 가진 제가 내년 총선 승리를 보장하겠다”며 “한 석이라도 더 가져오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나경원 효과’는 지난해 6·13지방선거와 지난 4·3 보궐선거에서도 증명했다. 보수진영 내부에서조차 홍준표 당시 대표에 대한 비판 여론이 극에 달하자, 일부 후보들은 당 지도부 지원 유세를 거부했다. 그러나 나 원내대표는 반대였다. 선거 유세 지원 요청이 쇄도했다. 한국당 초선 의원은 “나 원내대표가 현장에 나타나면, 한국당에 등을 돌렸던 유권자들도 호응해줬다”고 회고했다. 나 원내대표는 4·3 보궐선거를 한 달여 앞둔 3월 1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 달라”며 사실상 보수진영의 총결집을 유도했다.
문제는 ‘강경 보수의 딜레마’다. 전투가 아닌 전쟁의 최종 승부처는 외곽, 즉 중도층 포섭 여부에 달렸다. 나 원내대표가 강경 보수 프레임에 갇히면 갇힐수록 보수대통합과 외곽 공략은 어려워진다. 야권 한 관계자는 “유승민 의원을 필두로 한 바른미래당 보수파와 함께할 수 있겠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단기전의 유효타가 결국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야당 심판 프레임’에 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12년 19대 총선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현 민주당)도 이 프레임에 무릎을 꿇었다. 문 대통령이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였던 당시 민주통합당은 친노(친노무현) 원로인 한명숙 체제를 띄우고 진보색 강화에 나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재벌개혁 등에서 통합진보당과 비슷한 포지션을 취하며 ‘MB정권 심판론’을 전면에 내걸었다.
그러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로 맞섰던 새누리당(현 한국당)은 ‘야당 심판론’으로 되치기를 시도했다. ‘선거의 여왕’이었던 박 전 대통령의 선거전략은 적중했다. 새누리당은 질 수밖에 없었던 선거에서 과반(152석)을 차지했다. 민주통합당은 야당 심판론에 일격을 당하면서 127석에 그쳤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한 라디오에 출연해 “여당이 한국당 심판론을 들고 나올 수도 있고 그게 먹힐 수 있는 위험성은 있다”고 전망했다. 이미 한국당 정당 해산 청와대 국민청원자 수는 역대 최다 기록(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 심신미약 감형 반대·119만여 명)을 갈아치웠다.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의 연합 전선도 한국당 입지를 좁히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사학법 투쟁 당시는 ‘열린우리당 vs 범야권’ 구도였다.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조차 참여정부를 강하게 비토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당과 야 3당이 합세해 ‘한국당 고립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황교안+나경원’의 시너지가 당시 대세론이었던 박 전 대통령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점도 제1야당의 고민거리다. 5월 14일 임기를 마치는 김민석 민주연구원장은 ““나 원내대표는 한국당을 망하게 할 일등공신”이라며 “대선은 박근혜, 지방선거는 홍준표, 총선은 나경원이 망쳤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힐난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