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육상계 성정체성 논란 중심에 선 남아공 출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캐스터 세메냐.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국제 스포츠계를 뜨겁게 달궜던 ‘성 정체성 논란’이 일단락됐다.
2018년 11월 국제육상연맹(IAAF)은 ‘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은 여성 선수들의 육상 대회 출전을 제한한다’는 취지의 규정을 신설했다.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의 일종) 수치가 5n㏖/L가 넘는 여성 선수에 대해 6개월 가량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기준 밑으로 낮추는 치료를 받으면 출전할 수 있다”는 취지의 규정이었다.
당시 국제육상연맹의 규정 신설에 즉각 반발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출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캐스터 세메냐였다. 세메냐는 일반 여성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여자 육상 선수였다.
세메냐는 ‘테스토스테론 수치’ 관련 규정을 신설한 국제육상연맹을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제소했다. 하지만 5월 1일(현지시간) 스포츠중재재판소는 세메냐가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며, 국제육상연맹의 손을 들어줬다.
5월 1일 스위스 로잔에선 스포츠중재재판소 기자회견이 열렸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세메냐의 성 정체성 논란 관련 판결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자리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스포츠중재재판소 관계자는 “세메냐와 국제육상연맹 사이에서 불거진 성 정체성 논란과 관련해 스포츠중재재판소는 역사에 남을만큼 긴 시간 동안 고심을 거듭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국제육상연맹이 신설한 테스토스테론 관련 규정이 더 합리적인 결정이라 판단했다. 스포츠중재재판소는 세메냐가 제기한 소송을 기각한다”고 전했다.
스포츠중재재판소 판결 결과에 따라 국제육상연맹은 테스토스테론 관련 신설 규정을 5월 8일부로 발효할 방침이다. 국제육상연맹은 여자 400m, 여자 400m 허들, 800m, 1500m, 1마일(1620m) 경기 등 5종목에 해당 규정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세메냐, 육상대회 참여하려면 테스토스테론 수치 낮추는 약물치료 받아야
5월 1일 스포츠중재재판소를 나서는 캐스터 세메냐. 사진=연합뉴스
캐스터 세메냐는 일반 여성들보다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수치가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진 여성 육상선수다. 세메냐는 다른 여자 육상선수들보다 월등한 근육량을 자랑했으며, 세메냐 얼굴에 난 수염은 성 정체성 논란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세메냐의 성 정체성 논란이 처음 불거진 건 2009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였다. 세메냐는 800m 금메달을 따며, 화려하게 육상계에 데뷔했다. 2위와의 격차가 상당히 컸을 정도로 세메냐는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했다.
그러자 세계 각국 육상 관계자들은 세메냐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대회 주최 측은 특별의료조사반을 꾸려 세메냐를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국제육상연맹 측은 “세메냐의 성별은 여자다. 여자 종목 출전에 문제가 없으며, 획득한 메달 역시 인정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세메냐 조사 자료가 외신 보도를 통해 유출되면서 성 정체성 논란은 확산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세메냐 체내엔 자궁과 난소가 없으며 잠복고환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테스토스테론 수치 역시 일반 여성보다 3배 이상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일부 의료 전문가들은 “세메냐는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으로 추정된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병의 일종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세메냐는 ‘간성(인터섹스)’로 분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세메냐는 공식적인 여성 선수로 인정받은 셈이 됐다. 세메냐가 여성 선수로 인정받은 배경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 국제 스포츠 관계자는 “남아공 당국과 세메냐 본인의 반발이 심했다. 여기다 세메냐 사례는 인권침해 논란으로도 번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여러 이유로 국제육상연맹은 세메냐의 대회 출전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메냐의 성 정체성 논란이 불거진지 얼마 되지 않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인 선수의 대회 출전을 허용하도록 규정을 변경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세메냐는 ‘2012 런던 올림픽’과 ‘2016 리우 올림픽’ 여자 육상 800m에서 은메달과 금메달을 획득하며, 선수 생활 전성기를 열었다. 하지만 2018년 국제육상연맹이 여성 선수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규제하는 규정을 신설하면서, 세메냐의 선수 인생은 암초를 만나게 됐다.
세메냐가 스포츠중재재판소에 국제육상연맹을 제소했지만, 스포츠중재재판소는 국제육상연맹의 손을 들어줬다. 이제 세메냐는 국제육상연맹 신설 규정에 따라, 대회 출전 6개월 전부터 테스토스테론 기준 수치를 낮추는 약물치료를 받아야 한다.
스포츠중재재판소 판결이 난 뒤 세메냐는 “예전부터 국제육상연맹은 나를 겨냥한 규정을 만들어왔다. 나를 좌절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국제육상연맹의 그런 행동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번 스포츠중재재판소 판결에도 나는 좌절하지 않겠다. 더 강해져서 남아공과 세계의 젊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스포츠중재재판소 결정과 관련해 항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5월 1일 스포츠중재재판소 결정에 대한 세계 육상 선수들의 의견은 분분한 상황이다. ‘장대 높이뛰기 여신’으로 국내팬들에게 친숙한 옐레나 이신바예바 IOC 위원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여자 선수들은 일반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이점이 있다”면서 국제육상연맹의 신설 규정을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