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가 중장기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그런데 매년 집행해야 할 투자금 규모가 천문학적인데다, 그동안 쌓아둔 현금 보유량을 훌쩍 넘어선다. 반도체 산업 불황으로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불과 1년 사이 반토막 났고, 회복 여부는 안개속이다. ‘과감’과 ‘무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삼성전자를 두고 ‘쓸데없는 걱정’이 나오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4월 30일 오후 경기 화성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삼성전자는 지난 4월 24일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메모리뿐 아니라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핵심은 대규모 투자다. 올해부터 2030년까지 11년 간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과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 원을 쓸 계획이다. 연간 11~13조 원이 집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삼성그룹은 이보다 앞서 지난해 8월 8일, 180조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투자 계획과는 별개다.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 5G, 인공지능(AI), 바이오로 대표되는 5대 사업 육성 등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다. 바이오 부문을 제외하면 모두 삼성전자가 투자할 분야들이다. 이 투자는 오는 2021년까지 3년 간 집행된다.
두 가지 투자 계획을 종합하면, 삼성전자는 2021년까지 3년 동안 단순 계산으로 최소 215조 원을 써야한다. 1년 단위로 쪼개면 71조 원 내외다. 삼성전자가 올해 투자 계획 가운데 순수하게 국내 투자비만 공개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 투자금액은 더 늘어날 수 있다.
지난 2월, 삼성전자의 유보금이 사상 최초로 100조 원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됐다. 실제 지난해 말 삼성전자가 보유한 현금 보유액(연결 기준)은 총 104조 2100억 원으로, 2017년 보다 83조 6000억 원 보다 24.7% 불어났다. 곧바로 지난 2016년 하만(Harman) 인수에 맞먹는 초대형 M&A가 이뤄진다거나, 대규모 투자가 단행될 것이라는 기대가 업계를 떠돌았다. 지난해부터 올해 발표된 투자 계획으로 매년 투입될 투자금액이 천문학적인 수치지만, 삼성전자의 투자 여력을 의심하는 시선이 거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100조 원은 삼성전자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 상품, 장기 정기예금 등을 모두 합친 것이다. 유연하게 사용이 가능한 현금을 정확히 집계하려면 매년 사용되는 고정비용(유지비, 설비투자 등)과 기본적인 운용 자산 등을 제외해야 한다. 이 비용들을 제외하고 지난해 말 삼성전자의 현금자산(별도기준, 단기금융 상품 포함)을 다시 보면, 실제로 전액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은 약 34조 원이다. 삼성전자가 매년 쏟아 부어야 할 투자금 71조 원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최근 업계 일각에선 삼성전자가 모자란 투자비를 마련하기 위해 외부에서 돈을 조달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외부에서 단계적으로 돈을 빌리든 회사채를 발행하든 만약 삼성전자가 외부에 손을 벌린다면,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1997년 10월 4억 6000만 달러 규모의 양키본드를 발행했다. 이 가운데 3억 6000만 달러는 5년 만기로 2004년 상환했다. 나머지 1억 달러는 2027년까지 만기가 남아 있다”며 “회사채의 경우 2004년 모두 상환한 이후 현재까지 삼성전자가 회사채를 발행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다만 정부가 최근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지원 대착 가운데 하나로 세제혜택을 제시했다. 삼성전자 투자 금액이 큰 만큼 법인세가 상당규모 감면될 것으로 보인다. 세제 혜택이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서초 사옥. 사진=고성준 기자
반대로 투자금이 실제로 늘어난 게 맞냐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와 올해 투자 계획에는 모두 ‘반도체’와 연구개발(R&D) 투자가 포함돼 있는 만큼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시스템 반도체 투자 계획과 그동안의 투자 규모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회사 사업보고서를 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기준 R&D와 시설투자에 각각 18조 6504억 원, 23조 7196억 원 등 총 42조 3700억 원을 썼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메모리와 비메모리 매출 비중을 토대로 단순계산을 해보면, 반도체 30조 원, 비메모리 10조 원이다. 최근 수년 간 이 수치는 큰 변화가 없다. 결국 올해부터 2020년까지 매년 비메모리에 투자하는 11~13조 원은 통상 투자해온 금액과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삼성전자가 외부에 공개한 내용만으로는 보다 더 구체적인 검증이 어렵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화성과 평택에 이미 시설과 공장 등을 건설 중이거나, 건설 계획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올해 발표된 투자 계획에 새로운 내용이 있는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가 말한 시설은 삼성전자 화성 캠퍼스 극자외선(EUV)동 건설과 평택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새 공장 건설 계획이다. 특히 화성 캠퍼스 건설 현장은 지난달 4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업장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거(화성 파운드리 신규팹) 짓는 돈(20조 이상)이 인천공항 3개를 짓는 비용”이라고 말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면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과감’, ‘무리’ 또는 ‘꼼수’의 경계 위에 오른 이번 삼성전자의 투자가 정부와 회사의 교감에서 비롯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다. 반도체 불황으로 올해 1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1년 전과 비교해 60% 줄어든 6조 2300억 원을 기록했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 올해 1분기 전체 수출 실적도 출렁였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에 사업구조가 편중돼 있는 만큼, 정부와 삼성전자가 투자를 늘려 사업 다각화를 추진해야 할 명분은 충분한 셈이다.
다른 시선도 있다. 올해 삼성전자의 투자계획 발표 직전까지 검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 회계 혐의와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가 연결돼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지난해 8월 8일 투자계획 발표 시점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이 뜨거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올해를 제외한 삼성전자의 마지막 중장기 비전 발표는 2009년 이건희 회장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은 직후였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관계자는 “투자 내용과 금액을 전부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다”면서도 “중장기 투자는 장기적으로 분할해 시장 상황에 맞게 집행할 예정이다. 초기 비용이 클 순 있어도 우려할 만큼 큰 자금이 한 번에 투입되진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번 투자는 단순 사업 다각화를 넘어 국내 중소업체와의 협력을 통한 한국 시스템 반도체산업 생태계 구축이 목표“라며 ”삼성전자 투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기타 논란과 관계없다”고 덧붙였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