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배정화가 9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9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일요신문’과 만난 배우 배정화(34)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편안한 분위기의 캐릭터,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사람의 역할을 맡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배정화는 최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해치’에서 미모와 화술을 겸비한 ‘천윤영(복단)’ 역을 맡아 야욕이 넘치는 팜므파탈을 선보인 바 있다. 천윤영은 밀풍군 이탄과 왈패 조직 우두머리이자 그의 첫사랑인 달문, 두 남자의 마음을 한 손에 쥔 여인이다.
목적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내는 천윤영은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남긴 무게감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만큼 시청자들 사이에선 “배정화가 연기했기에 더욱 잘 어울렸다”는 평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처럼 ‘센 캐릭터’에 찰떡처럼 잘 어울렸던 배정화의 ‘연기 변신’ 욕심은 그의 원래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휴식기에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민낯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배정화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 ‘동네 언니’ 같은 푸근함을 그대로 보여줬다. 연기로만 배정화를 마주했을 대중들에게는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배우 배정화. 사진=최준필 기자
이하는 배정화와의 일문일답.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배정화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 첫 사극 도전이었다. 무사히 종영한 데에 소감은.
“준비기간까지 약 7개월이 걸린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그렇고, 사극이라는 장르도 그렇고 굉장히 낯설었다. 지금은 작품에도, 배우와 제작진, 그리고 캐릭터에도 정이 많이 들어서 아직 종영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촬영하러 가고 싶을 정도다. (웃음)”
-윤영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 씬을 찍을 때였다. 보통 촬영할 때 NG를 거의 안 냈고, 이 씬 역시 원테이크로 한 번에 촬영을 끝냈다. 문제는 그 때 제가 소품용 피를 입에 머금고 있다가 뿜어야 되는데, 죽어 가면서 말하는 연기를 처음 해 보는 거라 입에 피를 너무 많이 머금고 있었던 거다. (웃음) 목 뒤로 피가 꿀떡꿀떡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NG를 내기엔 정문성 배우님(밀풍군 이탄 역)이 너무 완벽하게 감정을 잡고 계셔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입가로 조금씩 흘리는 거였다. 그러다가 뿜을 타이밍이 돼서 뿜었더니 너무 리얼하게 나와 버렸다. 정문성 배우님이 놀래서 제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고 하시더라. (웃음)”
배우 배정화. 사진=최준필 기자
-극중에서 달문과 이탄, 두 남자 사이에 서 있는데 현실의 본인이라면 누굴 택하겠나.
“여자의 마음이 그렇지 않나. 저는 지금까지 달문(박훈 분) 같은 사람을 만나고 좋아했는데, 막상 모성애나 연민 같은 감정을 한 번 느끼니까 이게 정말 파워풀한 감정이란 것을 처음 느끼게 됐다. 만일 현실에서 이런 두 부류의 남자가 있다면 제 머리는 달문 오라버니를 만나야 된다 하겠지만 마음은 탄이 같은 사람에게 가지 않을까. 누군가를 동정하고 연민하고, 모성애를 느끼는 것도 강력한 사랑이겠구나, 이걸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걸 처음 깨달았다.”
-2006년 연극으로 데뷔 후 10년 이상 연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욕심나는 배역들도 있었을 것 같다.
“저는 그동안 센 역할을 많이 맡았다. 주로 그런 역할의 캐릭터에 저를 많이 불러 주시는 편이다. 물론 불러 주시면 언제든지 또 하겠지만 이왕이면 조금 힘을 빼고 할 수 있는 연기도 해 보고 싶다. 최근에 KBS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보는데 거기서 막내딸 역할을 보며 저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발랄하고 귀엽고, 망가지는 것 같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이지 않나. 일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사람 같은 캐릭터를 한 번 해 보고 싶다.”
-실제 성격과 본인이 맡아 온 캐릭터들이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사실 제가 정말 털털하고 편한 성격이다. 동네 돌아다닐 때도 트레이닝 복 하나 입고 화장도 전혀 안 하고 잘 다닌다. 그런 상태로 동네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을 돌면서 남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그런다. 원래 성격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샵을 안 들러도 되는 역할’이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웃음) 영화 오디션을 보러 갈 때도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고 간다. 그게 가장 제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제 자신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태도로, 연기도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
배우 배정화. 사진=최준필 기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여가 시간에는 무슨 일을 하나.
“작품 하나가 끝나면 보통 책을 보거나 여행을 다닌다. 태국은 1년에 2번 정도 가는데, 벌써 10년 째 꼬박꼬박 방문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여행을 다녀와야 제 안에서 감정이 정리가 된다.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 보게 되는 식이다. 보통 한 번 가면 짧으면 열흘, 길게 있으면 한 달 정도 머문다. 참고로 태국은 음식이 너무 맛있다. 특히 소고기 갈비 국수를 추천한다. 고춧가루를 뿌리고 고수를 얹어 먹으면 한국 음식 같다.”
-요즘은 영화계도 그렇고 연예계 전체에 ‘여풍(女風)’이 불고 있다. 오래 연기한 여배우로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정말 그렇다. 이제까지 영화에서 여자 배우들이 할 역할이 없었다. 여배우들은 크게 딱 세 가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 피해자 가족, 그리고 술집 여자. 그런 역할이 아니더라도 늘 수동적이거나 뒷전의 역할을 맡아왔던 것 같다. 특히 조연 배우들의 경우는 나이 제한 등이 있어서 갈수록 할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들기 까지 했다. 배우들끼리 모여서 ‘역할이 없어’ 라는 말을 계속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만큼 요즘 상황은 제게 있어서 고무적이다. 이렇게 업계의 분위기가 변해가면서 여성 배우들에게 조금 더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을까 기대가 크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활동에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배우상이 있다면.
“드라마 ‘해치’를 통해 시청자 분들이 윤영이란 역할을 응원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한 마음 뿐이다. 제가 이 작품을 통해서 배우로서 조금 더 성장하고, 더 큰 배우가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도록 제가 만들어 나가야 할 것 같다. 그게 저를 선택해 주신 감독님, 작가님, 그리고 시청자 분들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안주하거나 멈추지 않고 더 연기적으로 성장하고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작품으로 찾아뵐 수 있는 그런 배우로 남고 싶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