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대표와 이인영 신임 원내대표가 5월 9일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출범 2주년 기념 굿즈 런칭 행사에 참석한 모습. 박은숙 기자
여권 발 장기집권의 총 기획자는 이 대표다. 그는 민주당의 ‘20년→50년→100년’ 장기집권론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다. 당 원외위원장을 격려한 자리에선 “내년 총선에서 260석(지역구 240석+비례대표 20석)쯤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집권론에 이은 ‘260석 싹쓸이론’이다.
이 대표는 여의도의 대표적인 전략가다. 당 총선 기획단장부터 대선 기획본부장, 창당 기획단장 등 주로 선거기획을 도맡았다. 친문계 한 당직자는 “이 대표는 김대중(DJ)·노무현 정부 출범의 최대 개국공신”이라고 귀띔했다. 선거판 그리기에 있어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가’라는 얘기다.
21대 총선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는 측근들에게 장기집권 구축의 당위성과 플랜을 자주 언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7선 국회의원인 만큼, 진보세력 장기집권 토양을 만든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지로 분석된다. 지난 대선 때 ‘보수 궤멸’을 주장한 이 대표가 최근 공개석상에서 ‘마지막 정치’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는 ‘이해찬 불쏘시개론’과 맞물린다.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빠루(쇠 지렛대)를 들고 동물국회를 연출하자, 이 대표는 “전 이번 국회로 정치를 마무리하려고 마음먹고 천명한 사람”이라며 “이 국회를 이대로 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둑놈들한테 국회를 맡길 수 없다”며 직접 채증에 나섰다. ‘이해찬 불쏘시개론’이 당 내부에 국한하지 않고 외부로 화력을 옮긴 것이다.
애초 이해찬 불쏘시개론의 화력은 민주당 공천 과정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대표가 ‘셀프 불출마’를 고리로 당내 수도권 및 비문(비문재인)계 중진을 강하게 압박한다는 게 핵심이다. 세대교체 등 당내 인적쇄신을 위해 자신을 먼저 태우는 희생을 감내, 중진 물갈이의 명분을 만들겠다는 포석이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이 대표가 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 나설 때부터 ‘나 떨고 있니’를 외친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며 “총선 과정에서 당내 갈등 불씨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은 21대 총선을 1년여 앞둔 5월 3일 ‘공천 룰’을 발표했다. 이해찬식 시스템 공천으로 불리는 이번 룰의 핵심은 ▲현역 의원 전원 경선 원칙 ▲정치신인 최대 20%(청년·여성·장애인 25%) 가점 부여 ▲당무감사 결과 하위 20% 현역 의원의 경우 20% 감점 등이다. 반면 단수 공천은 최소화, 인위적인 물갈이 논란을 차단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수도권 중진 가운데 의원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의원은 가시방석일 것”이라며 “정치 신인에게 밀리는 중진 의원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 룰 조기 발표는 이 대표가 직접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총선 공천 룰 발표 직전 이해찬 불쏘시개 화력을 한국당으로 돌렸다. 이는 일종의 ‘포석 깔기’다. 불쏘시개를 당 내부에 집중할 경우 당 원심력은 커진다. 자칫 당내 권력투쟁의 부메랑이 당 전체를 덮을 수도 있다. 반대로 불쏘시개 화력을 외부로 돌린다면, 공천 개혁을 앞세운 이 대표의 활동 반경은 넓어진다. 한국당을 치면 칠수록 중진 물갈이 추진이 한층 수월해진다는 얘기다.
또한 여당은 총선 공천 룰을 조기에 발표, 결과적으로 장외 투쟁 중인 한국당에 ‘국회 복귀’ 명분을 깔아줬다. 본격적인 총선 띄우기가 불가피한 한국당도 마냥 장외 투쟁 카드를 고집할 수만은 없다. 이해찬 불쏘시개는 당내 공천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고 한국당의 원내 복귀를 유인하는 ‘일석이조 카드’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다. ‘디테일의 악마’는 당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다. ‘비주류의 반란’으로 끝난 민주당 5·8 원내대표 선거가 이를 방증한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친문계 실세인 김태년 의원이 원내대표에 오르면 이 대표와 손잡고 공천 학살을 할 것이란 걱정이 당내에 파다했다”라며 “비문(비문재인)계가 ‘이해찬·김태년’의 연결고리를 끊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인영 호의 출범에도 친문 패권주의 우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주당 5·8 원내대표 선거는 공천 경쟁을 위한 ‘친문계 vs 비문계’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들의 정면충돌은 권리당원 모집 과정에서 불거질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국민참여경선을 도입, ‘권리당원 50%+국민안심번호 50%’로 선거인단을 구성키로 했다. 당 총선제도기획단장인 윤호중 의원은 권리당원 비중을 높인 이유에 대해 “20대 총선 당시 국민안심번호선거인단 100%로 구성했더니, 사실상 현역 교체가 거의 안 됐다”고 설명했다. ‘차르’ 김종인 색 지우기인 셈이다.
권리당원 표심은 당의 딜레마다. 이해찬 호가 출범한 지난해 8·25 전당대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권리당원 수는 71만 명에 달했다. 이는 2016년 8·27 전당대회 당시 권리당원 수(23만 명)의 세 배를 넘는 수준이다. 이 중 70%가 친문 성향의 권리당원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최근 두 번의 당 대표 경선에서 추미애·이해찬 호가 출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국 시·도당 위원장과 여성·청년 최고위원 등도 이들의 선택에 따라 울고 웃었다.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비주류의 반란을 지켜본 친문 성향 권리당원들이 향후 총선 공천 과정에서 ‘단일대오’를 형성한다면, 계파 갈등이 증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수 권리당원 등록 논란까지 번질 경우 흥행에는 ‘적색 경고등’이 켜진다. 공천 정국에서 당이 룰의 함정에 빠지는 순간, 친문계의 아킬레스건은 극대화한다. 룰의 딜레마는 친문계의 대표적인 약한 고리다.
민주당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당시 대선 경선 땐 ‘박스 떼기’ 논란, 2012년 19대 총선 공천 땐 ‘여론조작’ 의혹에 각각 휩싸이면서 두 선거 모두 참패했다.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 등을 모두 승리한 여당이 룰 딜레마에 빠진다면, 트리플 크라운은 물 건너간다는 얘기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공천 룰의 함정은 당 내·외 선거 때마다 친문계를 딜레마에 빠트린 변수”라고 밝혔다.
마지막 악재는 미래 권력의 대충돌이다. 계파 패권주의와 룰 딜레마가 맞물릴 경우 미래 권력 간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미 원내대표 경선을 통해 범 친문계는 분화의 길을 걸었다. 또한 낙천한 일부 수도권 중진이 무소속 출마를 감행, ‘셀프 자객공천’을 한다면 여권 분열은 불가피하다. 이 과정에서 이 대표 측과 친문 직계, 차기 대권주자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낙연 국무총리 그룹 등이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민주당의 총선 승리 방정식은 당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임기 4년 차에 치른 1996년 15대 총선에서 대대적인 인재영입을 단행, 전체 299석 가운데 139석을 획득, 1년 전 참패한 지방선거 후유증을 단번에 극복했다. 당시 영입된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을 비롯한 YS 키즈는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