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는 1970년대부터 약 20년 간 도망자로 살며 가장 오래 수감생활을 한 운동권의 수장이었다. 사진=임준선 기자
장기표 원장은 1971년부터 1993년까지의 22년 세월 중 9년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12년은 도망자 신세였다. 민주화 유공자로 보상금을 신청하면 한국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위치다. 10억 원은 넘는다는 게 그의 계산이다.
유혹은 있었다. 그는 말했다. “정치하면서 돈이 부족할 때마다 주변에서 ‘10억이면 크지 않나. 그거 좀 받아다가 뭐 좀 하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랬다. ‘그 돈 받아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그 돈을 안 받는 모습을 보여서 더 많은 사람이 우릴 지원할 수 있도록 하자.’“
왜 받지 않았을까. 그는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돈은 박정희 돈도 아니고 전두환 돈도 아니다. 국민이 낸 돈이다. 그런데 내가 왜 보상을 받나. 민주화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의로운 일은 명예를 선양해야 한다. 자꾸 돈으로 보상하면 퇴색된다”고 덧붙였다.
그에게는 데모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대한민국 대학생이 독재 정부를 물리치기 위한 데모를 하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이라는 캠퍼스가 있었고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 데모를 하는 건 우리가 누린 특권이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 장사하는 사람이 민주화 운동 의지가 있어도 데모할 수 있겠나. 노동자는 데모하기 어렵다. 국민 된 도리로 지식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다. 그래서 민주화 보상 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민주화가 모두의 업적이지 운동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만 보상해줘야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사업하다 망한 사람은 보상해주면 안 되나?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사람도 있다. 민주화 운동가랑 노동자랑 그 시절 누가 더 고생했나. 죽은 사람이 더 고생했지. 나는 살아있지 않나.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하면 좋은 대접을 받아 왔다. 그런데 사실 대한민국에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벌써 망했을 거다. 전부 농사도 안 짓고 공장에서 일도 안 하고 학교에서 글도 안 가르치고 데모만 했으면 나라가 안 망했겠나.”
이어 “누군가는 ‘그 사람은 자기 먹고 살려고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나도 내 나라 잘 살라고 한 거였다. 따져 보자. 그 사람이 자기만 먹고 살았나. 그 사람 노력으로 나온 물건을 우리도 사서 쓰고 그랬다. 사회는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서 발전한다. 어느 한 부분의 노력만 추켜세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장기표 원장은 운동권이 보여준 ‘챙기기’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특히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에 없었던 이해찬 대표가 보상금을 받고 또 ‘희생’했다는 이유로 유공자가 된 데에 대해 비판을 빼놓지 않았다. “희생자란 말은 법률적 용어가 될 수가 없다. 사망했거나 행방불명이거나 상이를 당했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해찬이 보상금 받은 것도 다시 살펴 봐야 한다. 해명한 거 보니까 말을 잘못했더라. 이해찬이 ‘나는 광주에 있지 않았지만 그때는 광주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광주 밖에서 광주 지원 운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라고 했더라. 그럼 대한민국에서 그때쯤 민주화 운동한 사람은 다 관련자다. 둘러대다 실수했다고 본다. 게다가 이해찬은 5·18민주화운동 전에 구속됐다. 밖에서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해찬 대표는 1999년 보상금 1억 2300만 원을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 집권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할 때 이 돈으로 ‘오월정의상’이란 상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그는 정당성 부재가 안타깝다고 했다. “광주항쟁은 5월의 정의다. 5월 하면 누구나 광주를 떠올린다. 이해찬이 민주화운동을 했다지만 광주 사람도 아니고 5월의 정의를 정립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돈 있다고 해서 아무나 4·19 혁명상을 제정할 수 있나?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5월의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개인이 나서서 하는 건 상식에 안 맞는다”고 했다.
수상자 선정에 대한 비판도 이어갔다. 상을 받은 사람 가운데 언론인도 포함돼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이해찬이 언론단체에게 상을 주기도 했다. 언론이라는 건 정부에 항상 비판적이어야 그 의무를 다 하는 거다. 집권 여당의 정책위원회 의장이 언론인에게 돈을 주고 또 언론단체가 받는다는 게 난센스다. 이해찬이 상 준다고 하면 난 안 받는다”고 말했다.
장기표 원장은 인터뷰 내내 한국 사회의 운동권이 보여준 ‘제 식구 챙기기’에 대한 비판을 거침 없이 이어갔다. “김대중 사람 가운데 서울대 교수 하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장관이 된 2000년쯤 1980년대 해직 교수 약 60여 명 정도를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선정해 각각 1억 3000만 원씩 약 80억 원을 나눠줬다. 이 사람들 가운데 광주랑 관련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는 적어도 1980년 5월 17일 전에 이 일과 관련해 해직됐어야 한다. 교수 가운데 1985년과 1986년에 해직된 교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도 전부 관련자라고 해서 돈을 줬다.”
“이 사람들은 김영삼 정부 들어서 이미 복직됐고 밀린 월급을 2억~3억 원씩 받았다. 그런 뒤 다들 장관도 하고 총장도 하고 이사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됐다. 그렇게 다 받아 먹고 10년 이상 지난 시점인 2000년대에 광주 항쟁과 무관한데도 약 80억 원을 주고받는 걸 보며 ‘진짜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운동권끼리 뭉쳐 자기들끼리 세상을 만들어 가는 행태도 비판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가 있다. 민주화운동공제회도 있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끼리 모여 서로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런데 민주화 운동 안 한 사람은 어쩌라는 거냐. 민주화 운동을 했든 안 했든 사람이 어려우면 사회적으로 해결해야지 민주화 운동 한 사람들끼리 해결하는 건 철학이 잘못됐다.”
장기표 원장. 사진=임준선 기자
장기표 원장은 동지든 누구든 비판의 칼을 거두지 않는다. 늘 홀로 외롭게 싸워왔다. 지금 몸이라도 뉠 공간이 있는 건 모두 전태일 덕이라는 그는 지금 서울에 위치한 82.5㎡(약 25평) 규모 아파트에 산다. 수입은 이 아파트를 저당 잡고 받는 ‘역모기지’ 95만 원이 전부다. 아파트는 전태일이 남긴 선물이다. 전태일의 모친이 소개했던 서울 도붕구 쌍문동 인근 29.7㎡(약 9평)짜리 무허가 집이 재개발을 거쳐 지금의 아파트로 변모했다.
그는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오며 돈 한 푼 벌어 본 일이 없다. ‘없는 사람 위한다,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좋은 집에 살면 사기치는 거다. 그런 사람이 잘 살면 거짓으로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25평 아파트도 과하다”고 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장기표는 누구? 타협 없는 정치고집 ‘고난의 길’ 장기표 원장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국민연합의 조직국장이었다. 서울 쪽 행동대장이기도 했다. 5·18세력의 사령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단과대 학생회장을 역임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자살 소식을 듣고 서울대 학생장으로 치르겠다고 전태일 유가족에게 제의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부독재에 대항해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10년 가까이 감옥에 갇혔다. 1990년 재야 운동의 제도권 진입을 목표로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전 지사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끊임없이 정계 진입을 노렸다. 하지만 타협 없는 자신만의 정치 고집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 왔다. 그는 현재 신문명정책연구원을 꾸려 민주시장주의라는 자기 정치가 실현될 그날을 기다린다. 외곽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운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최훈민 기자 |
심재권도 보상금 안 받았는데…왜? 운동권이었던 심재권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보상금을 받지 않아 화제가 됐다. 장기표 원장은 심 의원이 보상금을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장기표 원장은 “내가 수배 번호가 1번이었다. 나를 굉장히 잡고 싶어했다. 학생들 다 동원해서 데모할 준비를 해놓고 김대중 당시 의장한테 보고했다. 의장이 고개를 끄덕 끄덕해서 내란죄가 됐다”며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국민연합의 조직국장이었고 심재권 의원은 홍보국장이었다. 둘은 잘 도망 다녔다. 3년 반 동안 안 잡혔다. 하지만 영원한 도망은 없었다. 심 의원이 1983년 말 먼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씻김굿’을 당했다. 이른바 탈탈 털렸다. 유화 국면이라 구속까지는 가지 않았다. 풀려난 심 의원은 곧바로 호주로 유학을 가서 2000년대에 귀국했다. 심재권 의원이 없는 동안 장기표 원장 등 운동권 주요 인사는 치열하게 싸웠다. 장 원장은 “다른 사람들 다 받을 때 왔으면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안 그랬을 거다. 아마 동지에게 미안함이 남아서 그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