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자 윤중천씨 등에게서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정황과 성범죄 의혹을 받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5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5월 16일 밤 11시경 서울중앙지법 신종열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김 전 차관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혐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부터 3시간가량 진행된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동부구치소에 대기 중이던 김 전 차관은 곧바로 구속수감됐다.
신 부장판사는 “주요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이나 도망 염려 등과 같은 구속 사유도 인정된다”며 발부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김 전 차관이 두 차례 조사에서 “윤 씨를 모른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한 점, 성폭력 피해 주장 여성 이 씨와 뇌물을 공여한 최 씨 등을 회유하거나 입 단속하려 한 점, 지난 3월 심야 출국 시도를 한 점 등이 고려된 결정으로 풀이된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 수사 권고 관련 수사단(단장 여환섭 검사장)은 수사단 발족 45일 만인 지난 13일 김 전 차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차관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해 검찰이 적용한 혐의를 사실상 전부 부인했다. 돈을 받은 사실이 없으며 공소시효 등 법리적 문제점과 함께 일부 뇌물 혐의에 대해서는 별건 수사라며 검찰에 맞섰다. 김 전 차관은 최후진술에서 “그동안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취지로 재판부에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검찰은 김 전 차관의 혐의가 충분히 소명되고, 김 전 차관이 지난 3월 23일 심야 출국을 시도했다가 제지된 점 등을 들며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김 전 차관은 검찰 조사에 두 차례 응한 점 등을 들며 맞섰다.
김 전 차관은 2013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의해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윤 씨로부터 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차관 취임 6일 만에 사퇴했다. 이와 관련해 두 차례 수사가 진행됐지만, 김 전 차관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조사를 거쳐 김 전 차관 사건을 재수사할 것을 권고했고, 수사단이 발족됐다.
하지만 재수사에 나선 검찰을 향한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두 차례 무혐의로 결론난 사건에 대한 재수사 방향과 공소시효 등 법리적용의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정치권력의 외압에 휘둘리고 수사공정성 문제를 빚었던 검찰조직의 신뢰회복이 우선시됐다. 급기야 민갑룡 경찰청장이 김학의 사건에 대한 수사 책임을 당시 검찰에 돌리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과 정치권에서 검경수사권 조정까지 부각시키면서 김학의 사건 재수사에 나선 검찰에 쏟아진 압박은 어느 때보다 거셌다.
지난달 19일에는 법원이 김학의 사건의 핵심 키맨인 윤중천 씨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윤 씨를 고리로 김 전 차관 혐의를 구체화하려던 검찰 계획마저 차질을 빚기도 했다. 법조계 안팎에서 김 전 차관의 구속은 물 건너 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됐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16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국회가 입법을 추진 중인 수사권 조정 법안과 관련해 검찰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기전 인사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특히 최근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로 검찰과 경찰 두 조직이 서로 으르렁대자 김학의 수사 역시 두 수사기관의 기싸움으로 번지는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
문무일 검찰총장 역시 지난 16일 대검찰청 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여야 4당이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을 비판하면서 그간 보여주지 않던 격정적인 심경을 몇 차례 내보였다.
검찰의 중립성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갑자기 양복 웃옷을 벗고 한쪽 팔을 옆으로 뻗어 손에 쥔 양복 웃옷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지금 뭐가 흔들리고 있나. 옷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흔드는 것은 어디인가”라며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옷을 보고 말하면 안 된다. 흔들리는 것이 어느 부분에서 시작되는지를 잘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비판을 하려면 검찰을 흔들려 하는 세력의 문제를 봐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어 문 총장은 “후배들에게는 수사권 조정이라는 과제를 더 물려주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수사 공정성 시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게 개인적 소망”이라며 검찰 개혁의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밤 검찰은 법원으로부터 김 전 차관에 대한 구속영장을 받아냈다. 윤 씨 영장 기각으로 자칫 동력을 잃을 뻔했던 수사의 불씨를 살려낸 것이다. 김 전 차관의 신병을 확보한 검찰은 구속영장에 범죄 혐의로 적시하지 않은 성범죄 의혹을 집중적으로 추궁할 예정이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성범죄 의혹을 추가로 수사하면서 윤중천 씨에 대한 영장을 재청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또 김 전 차관의 사건이 불거진 2013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 등의 수사외압 의혹 관련 수사도 이달 안으로 마칠 계획이다.
하지만 여전히 공소시효 등에선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은 만큼 최종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단키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일각에선 김학의 사건이 검찰 조직의 사활을 건 수사가 될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법원이 깔아준 재수사 기회를 검찰이 어떻게 풀어나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