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국토부장관이 3기 신도시 지정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고성준 기자
정부는 지난 5월 7일 3기 신도시 지정을 발표했다. 1, 2기 신도시 교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과 더 가까운 거리에 3기 신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기존 신도시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주민들은 “기존 신도시가 베드타운(bed town. 잠만 자는 도시)’에서 더 악화돼 ‘배드타운(bad town. 나쁜 도시, 죽은 도시)’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악화된 여론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김현미 국토부장관이다.
국회의원을 겸직하고 있는 김 장관 지역구는 1기 신도시인 일산 서구(고양시 정)다. 평일 낮 김 장관 일산 지역구 사무실을 방문해봤다. 사무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실 앞에는 주민들의 욕설 섞인 항의 글이 잔뜩 적혀있었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김 장관 지역구 사무실은 3기 신도시 발표 이후 주민 항의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한 상인은 “사실상 대피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김현미 장관 지역구 사무실에 항의 낙서가 적혀있다.
3기 신도시 지정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주민은 “지역구 사무실이나 의원실로 항의전화를 여러 번 했는데 받지도 않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답답한 주민들은 최근 김 장관 집 앞에서까지 항의시위를 했다.
김현미 장관 지역구 사무실에 항의낙서가 적혀있다.
최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김 장관이 지역구를 변경할 것이라거나, 비례대표 배정을 약속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 장관 측은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 장관이 일산 집을 팔고 이사했다는 제보도 있어 직접 방문해 확인해봤으나 역시 사실무근이었다.
이 같은 소문까지 도는 이유는 김 장관이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를 변경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 주민은 “주민들 입장에선 총선이 1년도 안 남았는데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믿기지 않는 거다. 그러니 ‘비례대표 약속받은 거 아냐?’ ‘지역구 옮긴다는데?’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못 가 사그라질 것으로 예상됐던 기존 신도시 주민들의 반발은 점차 조직화되고 있다. 주민들은 지난 5월 12일 첫 번째 항의집회를 연 데 이어 앞으로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 계획이다. 향후 집회에는 기존 신도시 일산, 파주 운정 주민들뿐만 아니라 부천, 인천 등 수도권 주민들도 가세할 예정이다.
주민들은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안내장을 각 아파트 우편함에 배포하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집회 참여는 물론 청와대 청원, 주민소환투표까지 추진 중이다. 주민들은 온라인에 김 장관과 3기 신도시에 찬성한 단체장, 시의원 등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공개하고 전화와 문자 항의를 독려하고 있다.
특히 선거 때마다 우군 역할을 했던 지역 맘카페 등이 3기 신도시 문제로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내년 총선에 끼칠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주민은 “3기 신도시 계획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내년 총선에서 김 장관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인사들 전원에 대한 낙선 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민주당 30년 지지자라고 소개한 또 다른 주민은 “일산에서 민주당 후보는 영원히 당선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당초 김 장관의 내년 총선 기상도는 ‘매우 맑음’이었다. 국토부 장관직을 수행하며 정치적 무게감이 커졌고, 지역구 숙원 사업이었던 GTX-A 노선 착공식도 열었다. 이후 장관직에서 물러나 내년 총선을 준비하려 했지만 후임자로 지명된 최정호 장관 후보가 낙마하면서 일이 꼬였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김 장관이 물러난 후 3기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어도 여당 인사니 어느 정도 후폭풍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동안 쌓여왔던 설움이 폭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3기 신도시 반대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주민은 “일산에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 집값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 교통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고, 편의시설 등도 부족하다. 신도시만 지어놓고 방치하다가 또 신도시를 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3기 신도시 발표로 기존 신도시 주민들은 이미 다양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향후 집값이 폭락할 것을 우려해 계약금을 날리면서까지 입주를 포기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진행 중인 거래가 취소되면서 난처한 상황에 처한 주민들도 적지 않다. 부동산중개업자들은 매물만 잔뜩 나오고 사려는 사람은 없어 최근 거래를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주민은 “3기 신도시 발표가 나고 처음에는 주민들이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발표 10일 만에 집값이 전체적으로 10% 정도 폭락했다고 보면 된다. 문제를 실감한 주민들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면서 “부동산 거래는 완전히 정지됐고, 그렇지 않아도 편의시설이 부족한 상황인데 추가 개발은 다 물 건너갔다. 지금도 빈집이 많은데 이대로 가면 몇 년 안에 도시가 슬럼화될 수 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것은 지역이기주의 아니냐는 질문에는 “3기 신도시는 서울 집값 잡겠다고 추진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발표 이후 서울 집값은 전혀 변동이 없고 1, 2기 신도시 집값만 폭락했다. 서울 사는 사람들 거기에 신도시 생긴다고 안 온다. 기존 신도시만 죽이는 정책”이라고 답했다.
여권은 기존 신도시 주민들을 달랠 방법을 찾고 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우리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