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의 가격 흐름이 심상치 않다. 상승장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1일 만우절. 장난에서 비롯됐다. 지난 1일 미국 온라인 경제 매체 파이낸스매그네이츠는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폭탄을 떨어트렸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SEC가 자산운용사 ‘비트와이즈’와 투자회사 ‘밴엑’의 상장지수펀드(ETF) 신청서를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가짜뉴스였다.
얼마 안 가 ‘만우절 장난’인 것이 알려졌지만, 불붙은 상승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350만 원 수준까지 떨어졌던 비트코인은 급등세를 보였고, 2주 만인 5월 14일에는 990만 7000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잠시 900만 원 선을 내주기도 했지만, 22일 기준 950만 원(업비트 기준)에 거래되며 자리를 다지는 모양새다. 은행 창구에 ‘암호화폐 거래 계좌 신설’을 문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온라인 포털 사이트 검색어 상위에 ‘비트코인’이 다시 등장하는 등 재작년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암호화폐 시장이 다시 들썩거리고 있다.
쉬는 날 없이 24시간 이뤄지는 거래 구조가 여전한 데다, 상승과 하락폭 제한도 없는 변동성이 큰 시장인 만큼 투자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암호화폐 전문가들의 진단은 2년 전과는 다르다. “1년 넘는 침체기 동안 ‘체력을 다진 코인’만 살아남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진단이 우세한데, 업계는 스테이블코인에 주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 만우절 장난에서 시작됐지만 미중 갈등 타고 2배 훨훨
만우절 ‘가짜뉴스’에서 시작된 상승세였지만, 호재는 분명 있었다. 자산시장에 큰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이란 등 일부 신흥국들의 정치 불확실성이 고조된 점도 비트코인으로 자금이 몰리게 했다.
미국 기관들이 비트코인 등을 주목하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모회사인 ICE가 추진하는 암호화폐 거래 플랫폼 백트(Bakkt)는 오는 7월 실물 인수 방식의 선물 거래 테스트를 시작한다. 그동안 위험성 때문에 투자를 꺼리던 기관 자금들이 들어올 여지가 생기는 것인데, 블록체인 업계는 실물자산 보관의 안정성, 투자자 보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5월 21일 한국미래포럼을 찾은 브룩 피어스 비트코인재단 회장은 “올해 하반기부터는 블록체인 산업이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며 “데이터의 소유와 자산화에 대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명동에 위치한 빗썸 비트코인 거래소. 임준선 기자
재작년 2500만 원을 넘었던 ‘일시적인 붐’이 아니라,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열릴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그는 “전 세계 많은 기업들도 이제는 때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며 “올해 암호화폐 시장에 봄이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그 규모를 “인터넷 버블이 왔던 90년대의 10배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의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2년 사이 다른 국가들은 암호화폐 거래제도 및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과 미국은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발행한다. 금융 선진국과는 거리가 먼 동남아 주요 국가들은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거래 시장 선점에 나섰다. 인도네시아 조코위도는 대통령이 직접 암호화폐를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같은 신기술이라며 적극 장려하고 있다. 국내 거래소들 역시 싱가포르 등으로 진출한 상태. 전세계적으로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만큼, ‘묻지마 투자처’가 아니라는 얘기다.
글로벌 기업들도 암호화폐를 활용한 비즈니스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 스타벅스는 암호화폐 결제시스템을 올해 안에 매장 결제에 도입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이를 토대로 금융업 진출까지 노리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스타벅스의 인프라를 감안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 역시 갤럭시S10에 이어 중저가폰에도 암호화폐 지갑을 탑재하겠다고 발표했고, 카카오도 내달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등 기업들 진출도 잇따르고 있다.
# 투자는 어떻게? “스테이블코인 주목해볼 만”
그렇다면 상승세가 계속될까. 단언할 수 없지만 “코인 말고는 아무 것도 없던 2년 전과는 다르다. 예전처럼 쉽게 폭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암호화폐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한국 시장이 더 가격이 낮다는 점도 특징이다. 재작년 한국 시장에 두드러졌던 김치 프리미엄(한국 시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10~20% 더 높은 가격에 거래가 이뤄지는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재작년에는 김치 프리미엄이 20~30%, 많게는 50%까지 끼는 등 국내 시장이 유독 과열됐지만 지금은 은행을 통한 자금 유입이 막히면서 되레 역프리미엄(한국 시장이 더 저렴한 것)까지 생긴 상황이다.
다만 예전처럼 우후죽순 코인이 생겨날 시기가 지났기 때문에, 코인의 가치와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유통에 실패한 암호화폐를 만든 적이 있는 업계 관계자는 “2017년이 ICO의 해였다면 이제는 ICO를 한 코인들 가운데 기술 개발 및 협업에 성공한 곳만 살아남는 모멘텀”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업비트에서 취급하는 암호화폐 수는 170여 종에 달하는데, 이 중 4~5개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암호화폐 관련 마케팅 전문가는 “기업들과의 기술 협업에 성공해 실제 유통까지 가지 않는 코인들은 주식시장에서 상장폐지되는 것처럼 매집 소각되는 과정으로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며 “금융, 유통 등 각 영역별로 크게 1~2개씩만 살아남고 다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떤 코인에 투자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스테이블코인’을 추천했다. 스테이블코인(Stable coin)은 금, 부동산과 같은 자산과 직접 연결하거나 알고리즘을 통해 가치를 고정한 형식의 암호화폐다. 테더(USDT) 등이 대표적인데, 테더는 달러(법정화폐)를 담보로 하는 형태다.
스테이블코인은 전통적인 금융 기업들이 블록체인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영역이기도 하다. 실제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금융회사들의 참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빌로이 드 골로(Francois Villeroy de Galhau)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가 스테이블코인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는데, 그는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BTC)과 같은 투기성 자산과 상당히 다르다. 금융시스템 내에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7년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라 투기성 자산”이라고 얘기했던 점을 감안할 때, 달라진 시선을 알 수 있다는 분석이다.
빌로이 총재는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을 구분 지으며 프랑스 중앙은행이 “토큰화 증권, 상품, 서비스를 위해 민간에서 진행하는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며 진출 가능성도 내비쳤다.
미국 대형 투자은행 JP 모건 체이스가 기업 고객 간 결제 처리에 사용할 스테이블코인을 개발 중이며 페이스북은 왓츠앱 메신저에서 사용할 스테이블코인을 준비하는 등 종이돈과의 교환을 보증하는 스테이블코인이 블록체인 이슈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 업체 중에서는 신현성 티몬 의장이 주도적으로 개발한 테라가 주목을 받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인 테라는 암호화폐 가격 안정성을 보장하는 토큰 이코노미 설계는 물론, 티몬·배달의민족·큐텐(Qoo10) 및 동남아 최대 중고거래 사이트 캐러셀(Carousell) 등 아시아 주요 이커머스 플랫폼이 참여했다. 테라 측에 따르면, 현재 테라 얼라이언스에 가입된 플랫폼들의 연 거래액은 약 28조 원(250억 달러), 사용자 규모는 4500만 명에 이른다.
앞선 업계 마케팅 전문가는 “테라 케이스에서 보여주듯, 코인의 기술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실제 유통될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실제 거래 시장 확보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해 투자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