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이케부쿠로에서 87세 남성 운전자가 과속 운전을 하다가 모녀를 치어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이 남성은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녔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FNN 뉴스 캡처.
지난 4월 19일,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벌어진 일이다. 흰색 승용차가 정지 신호를 무시한 채 매섭게 돌진했다. 이 사고로, 자전거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31세 여성과 자전거에 타고 있던 3세 아이가 치여 숨졌다. 이후에도 운전자는 계속 폭주하더니 쓰레기 회수 차량을 들이받고서야 겨우 멈춰 섰다. 이 사고는 모녀 외에도 10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NHK에 따르면, 운전대를 잡은 건 87세 남성이었다. 이 남성은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녔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성은 자신이 사고를 낸 건 인정하면서도 ‘몇 차례나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은 없었다. 그래서 경찰은 ‘남성이 브레이크가 아닌 가속페달를 잘못 밟아 벌어진 과실 운전’에 무게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을 잃은 가장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은 아내와 딸의 영결식이 끝난 뒤 기자 회견을 자청했다. “조금이라도 운전에 불안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를 몰지 말아 달라” 그러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살던 젊은 여성과 겨우 3년밖에 살지 못한 어린 생명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줬으면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아울러 국가 차원의 대책도 촉구했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여러 가지 논의가 이뤄지고, 조금이라도 희생자가 줄어드는 미래가 됐으면 좋겠다”는 호소였다.
이케부쿠로 폭주 사고 피해자 모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는 대책 마련에 고심이 깊다. 일례로 2017년부터는 면허증 갱신 기준을 강화했다. 75세 이상은 3년마다 면허를 갱신하고 인지기능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만일 ‘치매가 우려된다’고 판정될 경우 운전면허를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에 사고를 낸 87세 운전자도 면허 갱신 시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통과됐기 때문이다.
릿쇼대학의 도코로 마사부미 교수는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에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다름 아니라 “젊은 층과 달리 노인은 교차로에서의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복잡한 과제에 대한, 인지와 반응속도가 떨어지는 탓이다. 교수에 의하면 ‘파란불에 액셀레이터, 빨간불에 브레이크’ 등 간단한 동작은 연령에 따른 반응 속도가 거의 차이가 없다. 일례로 20대와 70대를 비교하면 0.1초밖에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복잡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고령자의 경우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조작에 오류를 일으킬 확률이 커진다. 특히 모든 방향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차량이 많은 도심 교차로는 ‘복잡한 과제’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마사부미 교수는 “면허갱신 때 인지기능 검사를 무사히 통과한 노인이라도 이런 곳을 달리면 난폭 운전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고령 운전자에게 많은 것이 ‘과신(過信)’이다. 지난해 조사에 의하면 “운전에 자신감이 있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30대 남성의 경우 28.6%였다. 이에 비해 80대 이상은 남성이 76.0%, 여성은 58.3%으로 부쩍 높아졌다.
마사부비 교수는 “직장 혹은 일상생활에서는 연륜과 경험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운전의 경우 경험 축적과는 다른, 순간 대처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나이가 듦에 따라 쇠약해지는 신체기능은 운전에 필요한 능력과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그는 “지금까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아’라는 과신이 비극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번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새로운 대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고령자에게 자동 브레이크 기능이 탑재된 차량만 운전하도록 하는 면허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이다. 아울러 고령자들이 자진해서 면허를 반납할 경우 다른 이동 수단을 확보해주는 등 ‘노인의 이동권’을 보호하는 대책도 내놓기로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1998년부터 운전면허 반납 제도를 시행해왔다.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에게 택시 요금과 전동휠체어·보청기 등을 할인해주고, 정기예금 금리도 우대해주는 혜택이다. 다만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참여율이 저조했다. 어떤 고령자에게는 자가용이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해 “발을 묶지 마라”는 강한 반발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사고 이후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고령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한 4월 셋째 주 도쿄도의 면허 자진 반납 건수는 1000건이었지만, 사고 발생 직후인 넷째 주엔 1200건, 5월 첫째 주엔 1600건으로 늘었다.
일각에서는 곧 자율주행차가 시행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고는 일어난다. 이에 산케이신문은 사설을 통해 “고령 운전자와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정 나이가 되면 ‘운전 졸업장’을 주는 제도를 검토하자”고 제안해 높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이케부쿠로 사고 운전자 어떤 처벌 받을까 ‘고령이라 수감 면할 수도’ 12명의 사상자를 낸 이케부쿠로 사고 현장. 아메바뉴스 캡쳐 난폭 운전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87세 운전자가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로 자진 출두했다. 지팡이 2개를 짚고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TV를 통해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본 일본 국민들은 ‘거동조차 힘든 노인이 운전을 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경악했다. 운전자는 과연 어떤 처벌을 받을까. FNN뉴스에 따르면, 과실운전치사상죄가 적용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금고 또는 1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만약 운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판단되면 위험운전치사상죄를 적용하여 20년 이하의 징역이 선고된다. 하지만 실형 판결을 받아도 고령이라 수감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87세 운전자가 시간 내 보상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를 두고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12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고령이라 처벌받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피해자 가족의 심경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는 의견이 오가고 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