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 감독은 지난 5월 14일 인천 유나이티드의 9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일요신문] 유상철 감독이 K리그 사령탑으로 돌아왔다. 욘 안데르센 감독 사퇴 이후 임중용 감독 대행을 거친 인천 유나이티드의 선택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지난 2009년 춘천기계공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10여년 사이 K리그 3개 구단(대전, 전남, 인천)의 사령탑을 경험하게 됐다.
#또 한 번의 기회 받은 ‘유비’ 유상철
유 감독의 현장 복귀는 지난해 8월 전남에서 사임한 이후 약 270일 만이다. 23경기 동안 팀을 지휘했던 전남 드래곤즈에서의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3승 7무 13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전남은 8월 들어 최하위로 추락했다. 유 감독은 이내 지휘봉을 내려놨다. 이후 전남은 신임 감독이 부임하며 한때 반등하는 듯 했지만 최하위로 강등을 면치 못했다. 이는 유상철 감독의 이번 취임에 의문부호가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등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2011년에는 약 1년 6개월간 대전 시티즌을 맡아 K리그 감독직에 첫 발을 내딛은 바 있다. 2011년 시즌 중반, 부임 당시 하위권으로 추락한 대전을 맡아 첫 경기에선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후 12경기에서 3승 3무 6패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종 성적은 16개 팀 중 15위였다. 감독 부임 당시와 같은 성적이었다.
전남에서의 두 번째 도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이처럼 그간 K리그 무대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2000년 이후 K리그1(1부리그) 3개 이상의 구단에서 지휘봉을 잡은 감독은 그를 포함해 4명뿐이다. 박항서, 최윤겸, 황선홍 감독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과거 자신이 이끌던 팀에 우승컵을 안기거나 플레이오프, 컵대회 결승 등으로 팀을 이끌며 다수의 팀에서 러브콜을 받는 등 지도력을 인정 받았다. 그렇기에 유상철 감독과 인천의 만남에는 더욱 의구심을 제기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2002년 월드컵 신화를 이룬 스타들에게 유독 관대한 평가 잣대가 적용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2002 영웅 따라다녔던 구설
최근 K리그 현장에선 감독직에 오를 수 있는 문이 더욱 좁아졌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의 클럽 라이센싱과 K리그 감독 선임 규정 등에 따라 ‘P급 라이센스 소지’가 필수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지도자들이 KFA 아카데미로 몰리고 있다.
국내에서 취득 가능한 지도자 라이센스 중 P급은 가장 높은 등급이다. 그만큼 취득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취득 기회조차 흔치 않다. 각각 연 3회와 7회 실시되는 A급, B급 교육과 달리 P급 교육은 격년으로 1회씩 실시된다고 공지돼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만도 존재한다. 수강을 원하는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육 대상자로 2002 월드컵에 나섰던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이 우선 배정된다’는 푸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2002 월드컵 멤버 중 빠르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던 홍명보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지도자 생활 초기 ‘자격 논란’이 따라다닌 바 있다. 미국 무대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축구행정가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코치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A대표팀 코치직에 맞는 라이센스를 획득하지 못해 논란이 일었다. 이후 자격증을 따내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도 ‘특혜를 받았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A대표팀 수석코치, U-20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부터 10여년 간 지도자 생활을 지속해 온 그는 2017년 11월 축구협회 조직개편과 동시에 행정 총괄 책임자인 전무이사 자리에 오르게 됐다.
차두리 코치는 ‘전력분석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슈틸리케호에 합류한 바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설기현 또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며 잡음이 일었던 2002 월드컵 스타 중 한명이다. 그는 2015년 성균관대 감독을 맡을 당시 급작스런 현역 은퇴와 지도자 부임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에 더해 초기에는 대학 지도자 자격을 갖추지 못해 평상시에는 감독 역할을 하지만 경기 때는 벤치에 앉아 선수들을 직접 지시하지 못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수의 동료들이 지도자로 나서는 가운데 이영표 해설위원은 스포츠행정가의 꿈을 품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출범한 ‘스포츠혁신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스포츠 선진화·문화분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지난해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발족한 ‘K리그 발전위원회’에 위원으로 위촉됐다. 하지만 연간 5회의 회의에 모두 불참해 지적을 받기도 했다. 연맹 측에서는 회의 때마다 연락을 취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2년차를 맞은 올해, 첫 회의에는 참석해 자리를 지켰다.
#‘차근차근’ 단계 밟은 스타들
2002 월드컵 스타들의 제2의 인생에 씁쓸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선홍, 최용수 등은 지도자로서 성장 과정 면에서 모범 사례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고, 나름의 성과도 거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황선홍 감독은 자신이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전남에서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수석코치직을 거쳐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첫 지휘봉을 잡았다. 하위권 팀을 맡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표급 선수들을 배출해 냈고, FA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두 번째 팀이었던 포항 스틸러스에서는 리그와 FA컵 모두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FC 서울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추가했다.
FC 서울에서 선수, 코치, 감독을 모두 거친 최용수 감독은 팬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하나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다양한 팀에서 커리어를 쌓았던 황 감독과 달리 최용수 감독은 한 팀에서만 활약한 ‘FC 서울 원클럽맨’으로 통한다. 일본 J리그에서 활약하다 2006년 서울로 복귀, 플레잉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코치로 재직하며 세뇰 귀네슈(터키), 넬루 빙가다(포르투갈) 등 외국인 감독을 보좌했고 2011년 감독직에 올랐다. 이후 2012년 K리그 우승, 2013년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으로 서울팬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하나가 됐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은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업적이다. 신화의 주인공이 됐던 당시 멤버들이 뛰어난 스타 플레이어였다는 점 또한 절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부 인사가 선수생활 이후로도 모두에게 박수 받을 행보를 보였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팬들은 현역 은퇴 이후로도 여전히 존경받는 스타를 원한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