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이 엄수됐다. 사진 고성준 기자
이날 봉하마을에는 주최 측 추산 추모객 1만 2000여 명이 방문했다. 이른 아침부터 추모객이 몰려 봉하마을 입구로부터 1km 이상 떨어진 지점에까지 임시주차장이 마련됐다. 검문검색을 통과해 행사장에 입장하는 데만 20분 이상이 소요될 정도였다.
행사장까지 기자를 태워준 택시기사는 “역대 추도식 중 사람이 제일 많이 온 것 같다”고 했다. 이날 봉하마을은 최고기온이 30도까지 치솟았다.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날법도 했지만 추모객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추모객은 “우리 동네에선 노무현 추도식 간다고 하면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통령을 존경해 오게 됐다. 그동안 추도식에 와보지 못했는데 10주기라고 해서 휴가까지 내고 왔다”고 했다.
추도식에 앞서 권양숙 여사는 김정숙 여사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과 30분가량 환담을 나눴다.
부시 전 대통령이 직접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를 전달했다. 사진 고성준 기자
추도식은 오후 2시부터 묘역 옆 잔디광장에서 진행됐다. 추도식에는 정치권 인사들이 총집결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제외한 여야 4당 대표가 모두 참석했고, 정부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이, 청와대에서는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강기정 정무수석 등이 참석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경기지사 등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과 국회의원들도 대거 참석했다. 다만 노 전 대통령 비서관 출신인 김경수 경남지사는 항소심 재판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깜짝 손님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 초상화를 유족에게 전달했다.
추도식 첫 순서로 무대에 오른 노 전 대통령 장남 노건호 씨는 제일 먼저 부시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노건호 씨는 “아버지께선 부시 대통령의 지적 능력과 전략적 판단에 감탄하시곤 했다. 짚어야 할 것은 반드시 짚고, 전략적 사안의 핵심을 놓치는 법이 없다고 경탄하시던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추도식에 참석해준 부시 전 대통령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어 무대에 오른 부시 전 대통령은 “가족과 국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노무현 대통령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왔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 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였다”고 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풍산그룹의 후원으로 추도식에 올 수 있었다고 언급해 풍산그룹이 조명받기도 했다. 국내 방산기업인 풍산그룹은 부시 가문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풍산그룹 류진 회장의 선친인 고 류찬우 회장은 생전에 미 공화당 인사들과 각별한 관계였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은 유정아 전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의 사회로 국민의례, 유족 인사말과 추모영상,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추도사, 문희상 국회의장 추도사, 가수 정태춘 추모공연, 이낙연 국무총리 추도사, 이사장 인사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상록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참배 등 순서로 진행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추모객 행렬이 이어졌다. 사진 고성준 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은 추도사를 낭독하다 울먹이기도 했다. 문 의장은 “이별은 너무도 비통했다. 마음 둘 곳이 없어 황망했다. 지난 10년 세월 단 하루도 떨칠 수 없었던 이 그리움을, 이 죄송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며 “이제 노무현의 꿈을 향해 다시 전진하겠다. 이 짐은 이제 남아 있는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고 했다.
이낙연 총리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대통령을 마치 연인이나 친구처럼 사랑했다”며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 전 대통령님이 못 다 이루신 꿈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 대통령님이 꿈꾸신 세상을 이루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저희는 그 길을 가겠다”고 했다.
이어 모친상으로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대신에 정영애 노무현재단 이사가 무대에 올랐다. 정 이사는 “지난 10년 동안 저희는 대통령님에 대한 회한과 애도, 회고의 시간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대통령님의 마지막 당부처럼 슬픔과 미안함, 원망은 그만 내려놓고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정 이사는 “이제는 대통령님과 함께 시민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희망과 도전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고자 한다”고 했다. 노무현재단은 서거 10주기 추도식 슬로건을 ‘새로운 노무현’으로 정했다.
정 이사의 제안처럼 추모객들은 슬픔은 내려놓고 새로운 노무현 시대를 맞이할 희망에 찬 모습이었다.
추도식은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격식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퇴임 후에는 직접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추모객들도 노 전 대통령을 닮아 있었다.
추모객들의 어린 자녀들은 잔디광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추모객 중 상당수는 소풍 온 듯 잔디광장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담소를 나누며 추도식을 지켜봤다. 웃고 떠들며 축제 같은 추도식이었다.
한 추모객은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 대해 “고졸 대통령이지 않나. 요즘 말로 흙수저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이 추모객은 “그동안 내가 사는 지역에서 하는 간이 추도식에만 참석했었는데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직접 참석하게 돼 기쁘다. 오는 길에 사람이 많아 고생을 했지만 오길 잘한 것 같다”고 했다.
권양숙 여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고 있다. 사진 고성준 기자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추도식은 끝까지 질서 있게 진행됐다. 다만 한국당 인사들이 참배를 위해 노 전 대통령 묘역에 등장하자 추모객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다.
한국당은 불참한 황교안 대표를 대신해 조경태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한 추모단을 파견했다. 추모객들은 이들을 향해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고 항의하며 고성을 질렀다.
일부 추모객은 언론을 향해 적개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 추모객이 “TV조선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자, 주변 추모객들은 “옳소”라고 호응했다.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도 추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7년 서거 8주기 추도식에 마지막으로 참석했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앞으로 임기 동안 노 전 대통령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며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돼 다시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