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중음악사에서도 마성의 저음으로 확고한 아성을 쌓은 알토 여가수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일본 엔카의 여왕이자 국민가수인 미소라 히바리, 그리고 우리나라 대중 여가수 중 최저음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문주란, 홍콩 영화 전성기 시절 가수와 배우로서 큰 족적을 남기고 요절한 매염방(메이옌팡)의 존재감은 더욱 빛나고 있다.
미소라 히바리 앨범 재킷.
미소라 히바리. 그녀는 인구 1억 명의 일본에서 비공식 음반 판매량만 8000만 장 이상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가수다. 미소라 히바리는 변화무쌍한 표현력을 가진 저음을 갖고 꺾기와 독특한 비브라토와 그루브를 자유자재로 타는 가창력은 정말 대단하다. 여기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미모는 그녀의 인기를 배가시키는 요인이 됐다.
일본에서의 그녀의 위상은 단순히 국민가수 차원을 넘고 있다. 그녀는 쇼와(히로히토 일왕 시대 연호)시대 전 일본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대중예술인으로 위상을 지니고 있다. 1937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1989년 히로히토 일왕이 서거한 해에 사망했다.
쇼와 시대 일본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넘고 재건에 나서 최전성기를 맞았던 시절이었다. 미소라 히바리가 활동한 시기와 일본 경제의 전성기와 묘하게 겹치면서 일본인들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화려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녀의 노래 재능을 사람들이 알게 된 계기는 레나타 태발디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프리마돈나로 꼽히는 마리아 칼라스와 상당히 유사하다. 마리아 칼라스와 미소라 히바리가 성공하게 된 데에는 모두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됐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꼬마 마리아 칼라스는 어느 날 광장에서 갑자기 스페인 민요 <라 팔로마(La Paloma)>를 부르기 시작하자 행인들이 멈추면서 이 아이의 노래를 감명 깊게 들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딸의 노래 재능을 깨달은 어머니 에반젤리는 마리아 칼라스를 성악가로 성공시키는데 헌신적이었고 결국 딸은 세계 최고의 프리마돈나가 됐다.
미소라 히바리의 본명은 가토 가즈에다. 1943년 아버지 가토 마스키츠가 전쟁에 징집돼 집을 떠나기 전 환송식에서 당시 6세 꼬마는 노래를 불렀고 모여 있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 가토 기미에는 딸을 가수로 성공시키기 위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소라 히바리는 불과 8세 때 데뷔했다. 얼마 후 그녀는 일생의 스승이 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배우인 카와다 하루히사를 운 좋게 만나 배우면서 실력을 일취월장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 40년간 일본 가요계를 평정하는 여왕이 됐다.
문주란 앨범 재킷.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그녀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사망하고 동복의 형제자매들도 하나 둘 타계하면서 미소라 히바리는 슬픈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 다르게 떨어지면서 술과 담배에 의존하면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히로히토 일왕의 타계로 아들인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해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가와노나가레노요니(냇물이 흐르는 것처럼)>를 발표했지만 나빠진 건강으로 입원과 일시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같은 해 3월부터 장기 입원을 하게 된 미소라 히바리는 6월 24일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타계했다. 향년 52세였다. 그녀의 유작 <가와노나가레노요니>는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는 현재까지 한국계 루머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흘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0년 그녀가 내놓은 히트곡 <진세이 이치로(인생 한길)>에 나오는 가사 “이치도 키메타라 니도토와 카에누(한번 결정하면 두 번 다시는 바꾸지 않아), 코레가 지분노 이키루 미치(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길이지)”처럼 미소라 히바리에게 노래는 인생 한길이었다.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 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뇌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때는 늦으리” <동숙의 노래> 중.
1949년 부산 출신인 문주란(본명 문필연)은 17세 때인 1966년 <동숙의 노래>로 데뷔했다. 그녀는 흔히 외모와 목소리의 언밸런스의 대명사로 꼽힌다. 데뷔 당시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인생의 달관 경지에 오른 연배에 들어선 성숙한 여성의 감성으로 굵고 깊은 저음을 내는 여가수가 10대 후반의 소녀였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가녀린 소프라노 미성이 어울릴 것 같은 서구적이고 인형 같은 미모를 가진 그녀가 TV에 처음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충격이 더 컸다고 한다. 문주란은 ‘어른 목소리 내는 아이’로 화제를 모으면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필자는 지금까지 국내 여가수 중 문주란 전후로 그녀에 필적할 만한 완성도 높은 저음을 내는 여가수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저음은 낮을 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저음처럼 굉장히 굵게 나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음이 그녀가 변성기를 맞은 직후인 10대 시절에 완성됐다는 점에서 놀라울 뿐이다.
문주란표 저음의 참맛을 느껴 보려면 <동숙의 노래>뿐만 아니라 <타인들>, <돌지 않는 풍차>를 들어 볼 것을 권해 본다.
가수가 아닌 여자 문주란은 젊은 시절 많은 부침을 겪었다. 다행히 그녀는 1990년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현재까지 굴곡 없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 <영웅본색 3> 스틸 컷.
“체 영 모우 한 모우 노우 씨 얏 씩 칸 찬 란 처이 완 하 찜 싼(저녁 노을은 영원하지만 순간의 찬란함만은 어쩔 수 없네요” <석양지가> 중
매염방이 주윤발(저우룬파)과 함께 출연한 <영웅본색 3>(1989) 주제가인 <석양지가>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가사다. <영웅본색 1>과 <영웅본색 2>의 아성에 눌려 3편은 높은 평을 받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필자에게 <영웅본색 3>은 이 영화를 본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주제가 <석양지가>는 필자의 가슴속을 적시고 있다.
매염방은 1963년 10월 홍콩 출신이다. 홍콩 영화 전성기 시절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로 배우로 각인돼 있다. 큰 눈, 펑퍼짐한 코, 도톰한 입술 등 남방계 민족의 외모 특성을 매력으로 매염방은 배우로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본업은 어디까지나 가수였다.
매염방은 1982년 홍콩 TVB 주최 신인가요제 신수가창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성공가도를 이어가던 매염방은 불과 40세인 2003년 세상을 떠났다.
2003년 9월 기자 회견에서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다고 고백했으며 그해 12월 타계했다.
미소라 히바리와 매염방은 작고했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처럼 두 사람의 생전 목소리로 부른 노래들은 곳곳에서 계속 울려 퍼지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장익창 기자 sanbad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