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정부와 삼성의 행보에 의문을 표했다.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육성과 바이오산업 지원 등 정부가 삼성과 ‘한 배’를 탄 듯 보이면서도 삼성바이오 검찰 수사가 삼성의 윗선을 향하는 모양새가 낯설다는 것. 문재인 정부는 최근 기업프렌들리 행보를 보이며 유독 삼성과 친밀함을 보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여부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차명계좌 등의 문제에서는 날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계획을 밝힌 정부와 삼성에 정재계의 시선이 쏠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4월 30일 오후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이 열린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부품연구동(DSR)에서 악수하며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특집 대담에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남에 부담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재판을 앞두고 봐주는 것 아니냐는 말씀은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재판은 재판이고, 경제는 경제”라고 단호히 답했다. 이 부회장과 만남이 대법원 판결과 별개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오는 6월 ‘국정농단 사태’ 관련 대법원 판결을 앞둔 상태다.
지난해 2월 이재용 부회장의 2심 판결 이후, 특히 올 들어 정부와 삼성의 관계는 매우 끈끈해진 것으로 비친 게 사실이다. 지난 1월 청와대 초청 ‘기업인과의 대화’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국내 사업장을 방문해달라는 이 부회장의 요청에, 문 대통령은 “대규모 투자를 해서 공장을 짓는다거나 연구소를 만든다면 얼마든지 가겠다”고 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지난 4월 23일 청와대와 정부가 비메모리 반도체와 바이오, 미래형 자동차 등 3대 분야를 ‘중점 육성사업’으로 선정하고 정책역량을 집중키로 발표하자 삼성은 다음날 24일 ‘반도체 비전 2030’ 로드맵을 통해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133조 원을 투자할 계획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30일 삼성전자 경기도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이 부회장과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올 초 열린 ‘기업인과의 대화’ 자리에서 이 부회장이 요청한 일을 문 대통령이 실행한 것이다. 이날 문 대통령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세계 1위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밝힌 데 정부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밝혔고, 이 부회장은 “당부하신 대로 확실한 1등을 하겠다”고 답했다.
정부와 삼성의 이 같은 관계는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에 대한 검찰 수사와 이재용 부회장의 대법원 판결에 일종의 ‘시그널’로 인식되기도 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삼성바이오 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처음에는 윗선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기존에 없던 사건인 데다 가이드라인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사건의 ‘스모킹 건’이 된 내부 문건을 공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검찰의 삼성바이오 수사 이후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또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문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면담을) 검찰과 대법원이 엉뚱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삼성의 친밀해 보이는 관계가 삼성바이오 수사와 이재용 부회장 판결에 영향을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한창 짙어지던 중, 지난 22일 검찰은 김태한 삼성바이오 대표와 삼성전자 소속 부사장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오헬스 국가 비전 선포식’에 참여해 바이오헬스 분야에 정부의 정책 지원을 약속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가 한 쪽은 달래고 한 쪽은 어르는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경제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는 정부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삼성을 필두로 대기업과 친밀한 모습을 보이지만, 검찰은 그와 별개로 본인들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부는 정부 일을, 검찰은 검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문 대통령의 삼성 방문 타이밍이 적절치 않았다고 우려되지만 대법원이나 검찰 수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다”며 “청와대가 의도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의 검찰 수사는 그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