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최근 정치권에선 재평가 바람이 불고 있다. 한때 폐족까지 몰렸던 노무현 사람들은 정치권 주류로 부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으로 대표적인 노무현 사람이다.
퇴행하는 정치판을 바라보며 국민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은 23일 경남 김해시 노무현대통령묘역 일대가 추도식에 참가한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고성준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이 지난 5월 23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묘역에서 엄수됐다. 주최 측 추산 추모객 1만 7000명이 운집했다. 여권과 대립하고 있는 자유한국당도 조경태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한 추모단을 파견했다.
노 전 대통령 묘역은 이제 보수진영 인사들에게도 단골 방문지가 됐다. 노 전 대통령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노 전 대통령은 평소 학력과 신분 차별, 지역주의를 넘어서 이념과 정파도 초월하고자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앞서 김광림 최고위원이 언급한 것처럼 실용주의자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한미FTA 체결, 이라크 파병,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지지층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정책들도 뚝심 있게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반미 하면 어떠냐”라는 발언까지 했었지만 한편으론 대미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 증거로 지난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엔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참석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 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였다”면서 “그 목소리를 내는 대상은 미국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저희는 물론 의견의 차이는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차이점들은 한미동맹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그 공유된 가치보다 우선하는 차이는 아니었다”고 했다.
지지층에서는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며 반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념의 틀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한미FTA 체결 이후 대미 무역 수출액은 크게 늘어났고 ‘노무현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노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지만 잘못된 정책은 곧바로 수정하는 유연한 사고도 가진 인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3년 차에 접어들 때 ‘새벽시장 일자리 트럭에 타려 아줌마끼리 머리채를 잡는다’는 내용의 서민경제 현장 점검 결과를 보고받고 정책 대전환을 시작했다. 집권 3년 차에 정책 전환을 결정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치권 대치 정국이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권이 노 전 대통령의 포용력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유한국당 소속 이재오 전 의원은 최근 TV조선 ‘강적들’에 출연해 “과거 원내대표 시절 노 전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 갔었다. 당시는 사학법 개정으로 여야가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다.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이번엔 이재오 대표 손을 들어 달라’며 양보를 요구했다. 노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대치정국이 풀릴 수 있었다”며 “문재인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의 포용력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취임사를 통해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가자”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측근들의 불법과 비리에 민감했다. 측근인 최도술 비서관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을 향해 스스로 재신임을 물을 정도였다. 한 언론은 ‘결벽증에 가까운 노무현식 책임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진동 정치평론가는 “지금 국민들은 양극단으로 갈려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전쟁 수준으로 상대진영을 공격하는데, 이는 절대 다수 국민들에게 굉장히 불편한 장면들”이라며 “‘과연 우리 정치가 진보하고 있느냐’라고 자문하면, 노무현 때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다들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정치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고, 이로 인한 정치 불신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뉴스타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에 직접 작성한 친필 메모 266건을 공개했다. 해당 메모는 노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정부 부처 업무보고, 각종 위원회 회의, 수석보좌관 회의 도중 직접 글을 쓴 것이다.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 참 느리다는 느낌’ ‘정부 뭐하냐? 똑똑히 해라’ ‘언론과 숙명적인 대척’과 같은 메모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당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날것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이 같은 메모가 공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그리움은 더 커졌다. 참여정부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작가는 KBS 라디오 ‘최강시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점점 더 그리워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깊은 생각에 대한 해석이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가 바뀌면서 그걸 다시 끌어내서 이 시대에 맞게 또 다른 해석을 계속 낳고 있기 때문에 계속 회자될 수밖에 없고 잊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계에서도 노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 노무현’, ‘노무현입니다’, ‘노무현과 바보들’, ‘변호인’, ‘물의 기억’ 등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
노무현재단은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노무현 전집’을 내놓았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쓴 저서와 연보 등을 7권으로 엮어 만든 10주기 특별판이다. 4000질 한정판으로 제작된 것으로 현재 온라인 서점인 ‘예스24’, ‘인터파크’, 일반 서점인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등에서 모두 품절됐다.
고 평론가는 “노 전 대통령처럼 자기 정치적 집단, 지지 기반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대통령으로 활동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는 노사모(노무현 팬클럽)조차도 국정운영에 적극 참여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통합적 정치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직접 얘기한 적도 있다”면서 “민주당은 자신을 낳아준 정당으로, 존중했지만 옳은 길로 가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지지를 포기하고서라도 자기 갈 길을 갔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명일·이수진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