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취임사를 하고 있는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사진=일요신문 DB
2018년 6월 20일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30대 남성 이 아무개 씨(39)는 삼성화재에서 보낸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문자엔 “고객님의 전화번호 정보가 ‘변경’되었습니다. [삼성화재]”라고 적혀 있었다. 이 씨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불법 개인정보 보관이라고 확신했다. 삼성화재가 자신의 과거 번호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까닭이었다.
이 씨가 삼성화재와 연을 맺은 건 문자를 받기 6년 전 딱 하루였다. 2012년 6월 5일 과거에 쓰던 011 번호로 삼성화재에 가입했다가 하루 만에 해약한 바 있었다. 이 씨는 2012년 말쯤 번호를 011에서 010으로 변경했다. 지금껏 DB손해보험을 이용했고 삼성화재를 가입한 적도 없었다.
삼성화재 개인정보처리방침에 따르면 삼성화재는 원칙적으로 거래종료 뒤 3개월이 지나면 고객의 개인정보를 폐기한다. 거래종료일에서 3개월이 지난 2012년 9월 5일 이 씨의 개인정보는 폐기됐어야 했지만 2018년 6월 20일 이 씨는 전화번호 정보가 ‘변경’됐다는 삼성화재의 문자를 받았다. (관련 기사: 삼성화재, 개인정보 불법 보관 들키자 한 행동 ‘실화냐’)
이 씨는 황당했다. 바로 금감원을 찾았다. 지난해 8월 13일 이 씨는 이 사건 관련해 삼성화재의 불법 개인정보 취득 여부를 조사해 달라고 금감원에 진정을 냈다. 3일 뒤 금감원의 처리 결과를 받은 이 씨는 어이가 없었다. 금감원이 내부 문서에 이 씨와 삼성화재가 계약 관계에 있다는 허위 사실을 적어 사건을 종결해 버린 까닭이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금감원 소속 A 씨는 이 씨가 2018년 1월 1일 삼성화재에 보험을 가입했다고 적은 뒤 “삼성화재의 업무 처리 절차 또는 고객 서비스에 관련된 사안은 금감원에서 직접 조사하거나 조치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적었다.
이 씨는 금감원 소속 A 씨의 조사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또 다시 민원을 제기했다. 다른 담당자에게 배정된 이 사건은 ‘복붙’ 처리됐다. 금감원 소속 B 씨 역시 이 씨와 삼성화재가 계약 관계에 있다며 허위 사실을 써놓은 채 사건을 종결했다. 답장에 담긴 내용까지 A 씨의 처리와 판박이였다. 이 씨와 삼성화재의 계약 날짜만 바뀌어 있었다. 두 번째 민원에 이 씨는 2017년 11월 28일에 삼성화재 보험에 가입됐다고 적혔다.
금감원은 삼성화재가 자체적으로 일을 덮을 수 있도록 해준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금감원에는 민원이 제기됐더라도 문제가 된 금융회사와 민원인이 계약 관계에 있을 경우 금융회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사무처리규정이 있다. 이 규정이 악용됐다는 게 이 씨의 주장이었다. 이 씨의 보험 가입 기록에 따르면 이 씨는 2012년 6월 5일 삼성화재와 계약한 뒤 하루 뒤에 취소한 게 전부였다. 금감원은 이 씨가 2018년 1월 1일과 2017년 11월 28일에 각각 삼성화재 보험에 가입했다고 기재했다.
금감원은 금융 회사의 법규 위반 의혹이 제기되면 직접 처리해야 한다. 금감원 사무처리규정에는 금융회사의 법규위반 및 부당 행위가 고발되면 금감원이 직접 처리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금감원은 민원을 그냥 삼성화재에 넘겨 버렸다. 이 씨는 상급 기관인 금융위원회에까지 민원을 제기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와 관련 금감원 관계자는 “경찰에서 다 해명했다. 따로 할 말 없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이 사건을 들여다 보고 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금감원 향한 불만 고조…권익위도 금융 민원 받는다 금감원의 소홀한 민원 처리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금감원 무용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정부는 금감원 외 민원 소통 창구를 하나 더 열 방침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도 금감원의 소홀한 민원 처리는 도마 위에 오른 바 있었다. 민원에 회신하지 않고 금융기관에 단순 이첩하는 비율이 20%가 넘는다고 나타난 까닭이었다. 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금감원이 금융회사로 이첩한 민원은 총 4만 4995건이었다. 이 가운데 단순 이첩은 9708건이었다. 전체 20%가 넘었다. 금감원은 민원 5건 가운데 1건을 나 몰라라 한 셈이었다. 금감원의 금융 피해자 보호 기능 역시 급격하게 줄어왔다. 금감원을 거친 피해구제율은 과거에 비해 거의 삼분의 일 수준이다. 2009년과 2010년 피해구제율은 각각 44.7%, 45.4%였다. 2016년과 2017년에는 20% 이하로 급감했다. 금융 분쟁 민원 피해구제율이 급격하게 하락한 원인에 대해 금감원은 자료 공개를 거부하고 나선 상황이다. 윤석헌 금감원장은 눈치 보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윤 원장은 5월 1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있었던 ‘2019년도 금융감독자문위원회 전체회의’ 때 “소비자 피해 사전 예방을 위해 금융사 자체의 소비자보호 역량을 강화시킬 것”이라며 “사후구제 절차 내실화를 위해 금융 관련 주요 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민원 처리에서 파악된 불합리한 사안은 감독·검사업무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금감원의 최근 상황을 따져 보면 윤석헌 원장의 이런 외침은 공염불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청렴도 하위 조직이란 오명부터 씻어야 할 상황인 까닭이다.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가 발표한 2018년 공공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 금감원은 4등급을 받았다. 청렴도 1등급이 가장 깨끗한 조직이고 5등급이 부패 조직이다. 2014년 4등급에서 2015년 최하위등급인 5등급으로 떨어진 금감원은 내내 바닥을 치다 지난해 들어서야 열등생 등급인 4등급에 안착했다. “금감원 임원 출신을 고용한 금융사는 제재 받을 확률이 낮다”는 지난해 초 한국개발연구원 연구 자료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정부는 금감원 역할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권익위는 지난해 금융소비자연맹에 의뢰한 ‘금융옴부즈만 도입 방안 연구’ 결과를 최근 정책에 반영키로 했다. 재정과 세무, 금융 등 분야 민원을 복합적으로 맡는 권익위 재정세무민원과가 금융기관 민원 전담팀을 구성해 운영할 예정이다. 금융 관련 민원의 소통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최훈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