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테슬라의 CEO인 엘론 머스크가 신차인 ‘모델 Y’를 공개하고 있다. 이날 머스크는 무대 위에 ‘에어 조던 1’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났다. AP/연합뉴스
1987년 제작된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마이클 더글러스는 항상 날카롭게 주름이 잡힌 깨끗한 와이셔츠에 멜빵을 매고, 떡 벌어진 어깨를 강조한 파워수트를 입고 등장했다. 넥타이 핀으로 넥타이를 단정하게 고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맡은 역할은 ‘고든 게코’라는 이름의 월스트리트 거물이자 악명 높은 증권 브로커였다. 완벽주의자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듯 게코는 항상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 흐트러짐 없이 말끔한 맞춤 정장을 즐겨 입는 캐릭터였다.
사실 이런 패션은 당시 뉴욕의 증권가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대의 알파맨들 사이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패션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었던 1980년대에는 사회적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묘사하는 미디어가 영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 속의 이런 캐릭터 묘사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이런 말쑥한 스타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포쿠스’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미국의 작가인 톰 울프의 말을 빌려 ‘나는 이 우주의 주인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럼 21세기인 오늘날 금융업계 종사자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는 현재 방영되고 있는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빌리언스’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빌리언스’는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 거물과 연방 검사의 대립을 그린 드라마로서, 주인공은 악명 높은 헤지펀드 회사 사장이자 억만장자인 보비 액셀로드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극중 액셀로드의 모습은 1987년 게코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말쑥한 정장은커녕 후드티에 청바지, 그리고 편안한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월스트리트 범죄 영화의 원조격인 ‘월스트리트’의 주인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에 대해 ‘포쿠스’는 그동안 실리콘밸리의 기업가들 사이에서만 유행했던 패션이 이제는 반대편 동부의 금융업계 종사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이와 관련해서 ‘포쿠스’는 CEO나 기업가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사업적인 ‘능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패션’이라고 말했다. 다만 실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당히 피곤하고 어려운 일인 반면 드레스코드, 즉 패션은 이에 비해 쉽고 간단하다. 어떤 재킷이나 신발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이미지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때로는 기업가들의 실적보다 패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포쿠스’는 말했다. 가령 독일 다임러 그룹의 전 회장인 디터 제체의 경우를 보면 그는 과거의 정장 차림에서 벗어나 언제부턴가 노타이에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빈티지 모델의 운동화를 신고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에 대해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그 산업(자동차 산업)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가 바로 한 남자의 의상에 나타나 있다”고 촌평했다.
그런가 하면 ‘테슬라’ 회장인 엘론 머스크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가령 지난 3월, 신형 모델인 ‘모델 Y’의 발표회장에서도 그랬다. 당시 머스크는 무대 위에 ‘에어조던 1’ 스니커즈를 신고 나타나 시선을 끌었다. 이에 대해 세계 유명 온라인 패션 매거진인 ‘하이스노바이어티닷컴’은 “엘론 머스크가 신고 나온 나이키의 커스텀 ‘에어조던 1’이 세계 최초로 선보인 ‘테슬라 Y’의 시선을 훔쳤다”라고 보도했다. 심지어 경제 전문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조차도 신형 자동차보다 머스크가 신고 나온 검은색과 빨간색이 뒤섞인 스니커즈를 더 비중있게 다룰 정도였다.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 작년 5월 프랑스의 한 행사에 예의 캐주얼한 패션으로 참석했다. EPA/연합뉴스
그렇다면 기업가들이 이처럼 양복이나 넥타이 대신 후드티나 청바지 등 편안한 차림을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전문 비평가들은 “오늘날의 회장들은 더 이상 회장처럼 옷을 입지 않는다. 대신 이웃집 사람 같은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역동적이고 여유로운 사람이다’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마케팅 측면에서 봤을 때도 100년 된 전통적인 회사보다는 가정집 뒷마당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처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쿠스’는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진 않다고 말했다. 현재 9000만~1억 3000만 유로(약 1200억~1700억 원)가량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억만장자인 슈테판 브로이어(61)경우를 보자. 과거 자동차부품 하청업체를 운영했던 그는 현재는 스위스 아스코나에서 레스토랑과 호텔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사실 그는 패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여름이 되면 맨발로 외출을 할 정도로 드레스코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태도에 대해 ‘포쿠스’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사람들은 일주일 가운데 7일이 캐주얼 복장을 하는 ‘캐주얼 프라이데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한 “바로 이것이 디터 제체, 엘론 머스크, 슈테판 브로이어, 그리고 ‘빌리언스’의 교활한 사기꾼인 보비 액셀로드의 패션에 담긴 메시지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입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막 입는 것 같아도 사실 ‘실리콘밸리’의 패션에는 특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포쿠스’는 지적했다. 오늘날의 이런 캐주얼 룩은 IT 기술 산업의 알파맨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과거 히피 문화의 본거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실리콘 밸리의 지리적 위치와 IT 기술개발자들 특유의 사고방식이 혼합되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개발자들의 사고방식이란,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스타트업 회사가 미국 북동부의 거대한 속물적인 기업에 반한다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IT 기술개발자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며 구별지었던 일부 금융업계의 거물들이 되레 이 패션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던 사람들이 실리콘밸리 기업가들의 패션을 흉내 내면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해 ‘포쿠스’는 ‘실리콘밸리 패션’이 여러 가지 스토리를 한꺼번에 들려주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이렇게 입음으로써 약간의 창업자 분위기와 제조업자 분위기를 동시에 풍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스티브 잡스처럼 말이다. 또한 ‘포쿠스’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저 금융거래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이렇게 이미지를 흉내내면 정말 그렇게 되긴 할까. 이에 대해 ‘포쿠스’는 패션업계는 근사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항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아마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ilyo.co.kr
남성 비즈니스 패션 어떻게 변해왔나? 스니커즈를 잘 신어라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남성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양복을 입는 것이 당연시됐었다. 유행이나 디자인에는 별로 관심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의 패션디자이너인 헬무트 랭이 등장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랭은 비즈니스 정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로, 그의 스타일은 세련미는 기본이요, 딱 떨어지는 정확한 재단이 특징이었으며, 셔츠나 터틀넥 스웨터와 매치하는 콤비 스타일도 가능하게 했다. 그후 패션디자이너인 에디 슬리먼이 전설적인 0 사이즈의 슬림한 정장을 선보이면서 남성 패션계에서는 또 한 번 변화가 시작됐다. 이렇게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스타일이 유행하자 남성들 사이에서는 신체사이즈에 대한 의식도 덩달아 바뀌었다. 요컨대 새로운 실루엣이 유행하면서 남성들도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약 10년 전부터는 래퍼 패션과 스트리트웨어 패션이 접목된 새로운 비즈니스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스니커즈, 청바지, 삼선 슬리퍼 등 꾸밈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게 최고의 미덕이 됐다. 이른바 ‘실리콘밸리 패션’이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알파맨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지 않고 미묘하게 표현한다는 데 있다. 가령 ‘오프화이트’나 ‘베트멍’을 즐겨 입는데, 이런 브랜드는 가격은 비싸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브랜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사이에서는 최신 트렌드인 ‘잇-스니커즈’를 잘 신는 사람이야말로 패션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가령 카니예 웨스트의 스니커즈를 신는다면 무조건 실패하지 않는 식이다. 실제 요즘 앞서가는 패션 리더들은 특히 스니커즈에 주목하고 있다. 가령 ‘루이비통’ 남성복의 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버질 아블로는 과거 운동화 가게를 운영한 바 있었다.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아블로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랄프 로렌(79)과의 만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이키의 ‘조던 13’을 신고 있었다.” 이는 백발의 노인에 대한 칭찬의 의미였다. 팔순을 바라보는 패션업계의 노장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운동화 취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이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