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관련 기자간담회에 발언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유 이사장은 지난해 하반기 대선 후보 지지율을 묻는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선두권을 기록했다. 여권에선 이낙연 국무총리에 이어 2위였고, 비정치인으로선 1위였다. 친문에서 밀던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그 대안으로 유 이사장은 급부상했다. 하지만 유 이사장은 “여론조사에서 내 이름을 빼 달라” “직업으로서 정치는 완전히 떠났다” 등의 발언으로 정치권 복귀설을 일축했다.
유 이사장은 5월 3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진보가 위기에 몰리거나 그 어떤 상황이 돼도 정계에 복귀할 의무는 없다”며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유 이사장의 대권 도전설은 가라앉지 않는 모양새다. 이는 유 이사장이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긴 탓도 있다. 5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서 유 이사장은 대선 출마와 관련된 대화 도중 “원래 (중이) 자기 머리를 못 깎아요”라고 말했다. 그동안 강한 부인으로 일관해왔던 것과는 온도차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지만 외부 여건만 조성된다면 출마를 고려해보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유 이사장이 사실상 결심을 굳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더군다나 당시 유 이사장에게 질문을 던진 이는 ‘문의 남자’로 불리는 친문 핵심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었다. 이날 양 원장은 “벼슬을 했으면 거기에 맞는 헌신을 해야 한다”며 유 이사장 출마에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민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양 원장은 여권 최고 실세이면서 손꼽히는 ‘선거통’이다. 총선 전략을 세우는 민주연구원장까지 맡고 있다. 그가 농담으로 유 이사장에게 그런 발언을 했을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유 이사장에겐 ‘출마하면 친문이 돕겠다’라는 것을, 지지자들에겐 ‘유시민은 대선 후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지지율은 높지만 현실 정치 기반이 턱없이 부족한 유 이사장으로선 정치에 전혀 뜻이 없었다 하더라도 양 원장의 발언에 상당히 흔들렸을 것이다.”
정치권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 이사장 행보를 놓고 여러 설이 무성했지만 대선 출마 쪽으로 무게가 기우는 모습이다. 여러 번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대선을 두 번이나 치렀던 문 대통령 사례도 거론된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한 방송에 출연, “(유 이사장은) 확실하게 나온다고 본다”고 했다. 반면, 유 이사장과 가까운 한 민주당 의원은 “정말 나올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데 믿지 않으면 유 이사장으로선 도리가 없지 않느냐. 일단 지금으로선 정치에 뜻이 없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다. ‘지금으로선’이란 단어에 대해 묻자 “정치가 어떻게 흘러갈지, 또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유 이사장이 대선에 뛰어들 경우 차기 판도는 요동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지지율 높은 후보가 한 명 더 늘어난다는 것은 여권엔 호재다. 가뜩이나 ‘선수’가 부족한 야당으로선 악재인 셈이다. 유 이사장은 여권 취약계층으로 떠오른 20대 지지율이 견고하고, 이낙연 총리와는 달리 영남권(경북 경주) 출신이라는 점, 방송 활동을 통한 높은 인지도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최근 민주당 안팎에서 이낙연 총리를 겨냥한 ‘호남 필패론’이 회자되고 있는 배경에 유 이사장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궤를 같이 한다.
여권의 셈법은 복잡하다. 특히 유 이사장 러브콜에 적극적인 친문 진영에선 미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물론 유 이사장을 대권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주류 의원들로 이뤄진 ‘부엉이 모임’의 최근 한 식사 자리에선 민주당이 먼저 판을 깔아줘야 한다는 얘기도 오갔다. 발언 번복, 정치 복귀 등에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유 이사장을 위해 최선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양 원장의 발언, 부엉이 모임의 이러한 논의는 향후 친문계가 유 이사장을 적극적으로 띄울 것으로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유시민 역할론’을 놓고는 의견이 분분한 모습이다. 이는 유 이사장 본선 경쟁력에 의문부호가 달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듭 익명을 요구한 한 친문 의원은 “유 이사장은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명확하다. 유 이사장의 강력한 팬덤은 확장성 측면에선 독이 될 수 있다. 보수진영의 황교안 대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면서 “유 이사장의 경선 레이스 참여는 당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가 그를 대선 후보로 미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친문 진영에서 유 이사장을 친문 후보의 ‘페이스메이커’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재명 경기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후 이러한 목소리는 더욱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 지사는 무죄 선고 직후 지지자들에게 “큰 길을 함께 가자”면서 대권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 지사는 주류인 친문과 관계가 껄끄러운 편이다. 이 지사는 비문계가 미는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친문 입장에선 잠재적인 경쟁자인 셈이다.
친문 관계자들은 이 지사와 경선에서 맞붙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한 친문 전직 의원은 “이 지사는 TV토론에 능하고, 친문에 밀리지 않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외부보다 내부에서 어려운 싸움을 할 수 있다”면서 “이 지사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지금 현재로선 유 이사장밖에 없다. ‘포스트 문재인’이 누가 될진 아직 모르겠지만 유 이사장은 이 지사 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유 이사장 역할을 ‘이재명 맞춤형 후보’ ‘대선 후보의 페이스메이커’ 등으로 규정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는 여권에서 이뤄지고 있는 친문계 분화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권 주류는 내년 총선과 차기 대선을 앞두고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든 상태다. 친문, 신친문, 친노 등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유 이사장은 친노다. 주류인 친문과는 결이 다르다. 이는 친문계가 과연 유 이사장을 대선 후보로 끝까지 지지할 것이냐는 회의론으로 이어진다. 앞서의 민주당 중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친문들이 유 이사장을 삼고초려하고 있지만 막상 경선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결국 자신들이 진짜로 미는 후보를 선택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유 이사장은 ‘불쏘시개’로 전락할 수도 있다. 물론 유 이사장 개인 역량으로 극복할 수도 있겠지만 조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친문계 협조 없이 경선은 불가능하다. 유 이사장 역시 이러한 현실 정치, 정확히 말하면 계파 간 이해득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하더라도 쉽게 출마를 선언하진 않을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