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법인 성일’의 최영환 대표노무사. 지난 5년간 약 130편의 영화에 노무자문을 했다. 박정훈 기자
최영환 노무사는 영화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던 지난 2014년 영화계의 노무자문으로 뛰어 들었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영화계 인식 변화와 함게 입소문을 타고 계약하는 영화가 늘어갔다. 포털사이트 영화인 검색에 그의 이름을 입력하면 등록된 필모그래피만 40여 편이다. 등록되지 않은 영화까지 합하면 지난 5년간 약 130편의 한국영화가 그와 사무실 직원들의 손을 거쳤다.
그는 “작품을 창작하는 데 직접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기록을 보면 좀 쑥스럽기도 하다”면서 “많은 경험을 하며 이제는 익숙한 일이지만 여전히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나서 엔딩 크레딧에 나와 우리 사무실 식구들 이름이 적혀 있으면 짜릿하다”고 전했다.
최 노무사도 앞서 봉 감독의 인터뷰를 온라인 뉴스를 통해 접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는 “분위기가 변해가고 있지만 사실 현장에서 감독들은 그런 부분에 조금은 둔감한 편이다. 감독들은 ‘창작’ 자체에 집중을 하기에 영화 총괄 관리를 맡은 제작부의 업무와는 괴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봉 감독의 발언이 영화산업 적인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봉 감독뿐만 아니라 최근 영화 현장에선 이런 분위기가 잘 형성됐다. 제작사가 요청하면 잘 따르는 감독들이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반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활발히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와중에 때론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는 “가끔은 원칙을 지키려는 내 의도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때론 업무를 진행하다 영화 제작사와 계약을 파기하기도 했다. 제작사가 비용 줄이기에만 급급해 법적인 문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경우였다. 그는 “물론 우리도 수임료가 필요하지만 노무사 업무 윤리상 그런 부분을 묵인하면서까지 계약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이 고민하던 차에 봉 감독의 발언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한 마디였다. 최 노무사는 “역시나 원칙 안에서 효율을 찾는 것이 정답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고 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고 귀국한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최준필 기자
그는 기생충 제작 과정에서 다른 영화와는 조금은 달랐던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촬영기간과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는 날짜가 겹쳤던 것이다. 그는 “2018년 7월 1일부터 영화제작이 근로기준법상 특례 업종에서 제외됐다. 주 52시간 근무를 준수해야 했다. 그 이전까지는 근로자 대표와의 서면 합의라는 절차를 거친다면 주 52시간을 넘어서도 얼마든지 더 찍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서 “기생충 촬영기간은 법개정 시기에 딱 걸쳐 있었다. 제작사 측에서 법 개정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근로시간 관리를 계획했고 결국 무리 없이 촬영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 노무사가 영화계에 첫 발을 들일때부터 모든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현재와 같은 노무자문의 개념이 도입되던 2014년에는 현장에서도 이 같은 부분이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다. 근로기준법과 같은 노동 관련 법규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이전까지는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들을 대부분 프리랜서로 계약하는 것이 관례였다. 부작용도 많았다. 근로시간이 지켜지지 않았고, 투자사가 정해놓은 엄격한 범위 내에서만 인건비가 지출됐다. 직급이 낮은 스태프는 최저 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처음 우리가 이쪽 일을 시작할 때 영화계 인식이 ‘그런 거 못 한다, 안된다’였다. ‘이렇게 해야만 법률적 문제가 안생기고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을 전달하며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제작팀은 ‘관습을 바꿀 수 없다. 무조건 예산에 맞춰 달라, 정해진 인건비 예산 안에서 문제가 없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이어간다. 우리나라 노동법은 일한 시간에 따라 임금과 수당이 지급돼야한다.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리 인건비를 확정할 수는 없다. 실제 법을 적용하는데 융통성 있게 관리하는 방안에 대해 자문을 하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제작사가 투자사에 인건비 유동성의 중요성을 이해시키기 시작했고 문제없이 영화도 만들어졌다. 추가 인건비가 나온다고 해서 영화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더라. 이제는 그런 분위기가 많이 정착됐다.”
박정호 책임노무사(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김건유 노무사, 최영환 대표노무사, 최현 부대표노무사. 최영환 노무사는 “지난 5년 동안 나혼자가 아닌 사무실 식구들 모두가 역할을 충실히 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박정훈 기자
지난 4~5년간 영화산업 현장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더 나아가야 할 부분도 존재한다. 투자사나 제작사, 제작사나 스태프간에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그는 “근로자와 제작사간에 충분한 협의 과정이 필요하다. 서로 입장을 조금씩 이해해 주고 합당한 수준의 협의점이 현명하고 빠르게 나와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근로기준법이 제조업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현장과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산업 관련 특별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런 법이라는 틀에 현장의 현실을 끼워 맞추려다 보니 부작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법을 준수하는 것이 비효율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맞다.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서 맞춰 나가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5년간 100편이 넘는 영화에 노무자문을 했던 최 노무사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영화는 무엇일까. 그는 “‘신과함께’ 같은 대작 영화에 참여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우리도 엄청난 것을 경험할거라 생각하는데 특별할 것은 없다. 촬영현장에 나가는 게 아니고 주로 제작사 직원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별다른 기억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노무법인 ‘성일’의 직원들은 특별했던 기억으로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영화 ‘백두산’의 고사 현장을 한 목소리로 꼽았다.
“성희롱 예방교육 등을 하고 나서 이어진 고사 현장에 참가했다. 분장 스태프 옆에 앉아 있었는데 배우 수지가 지나가다가 스태프인줄 알고 우리에게도 인사를 했다. 무려 ‘국민 첫사랑’ 수지가. 벌써부터 개봉이 기다려진다(웃음).”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