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서울시장과 양정철 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시장실에서 열린 면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종현 기자
양정철 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재인 대통령 최측근이다.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양 원장 일거수일투족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던 이유다. 그가 언제, 어떤 자리로 컴백할지를 두고도 여러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여권 관계자들도 양 원장이 내년 총선에서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었다. 결국 양 원장은 총선을 10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선거 전략을 세우는 민주당 싱크탱크(민주연구원) 수장에 올랐다.
양 원장은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듯 첫 출근길에서 기자들에게 “지금은 일에 좀 몰두해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로키’로 가야 할 것 같다”며 자세를 낮췄다. 양 원장은 별도의 취임식이나 기자간담회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급여도 받지 않기로 했다. 한 친문 의원은 “양 원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도 그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일에 몰두하겠다던 양 원장은 며칠 뒤 ‘대형사고’를 쳤다. 5월 27일 서훈 국정원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공개되면서 언론과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다. 양 원장은 “사적인 지인 모임”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야당은 맹공을 퍼부었다. 여권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처사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더 이상 야인 신분이 아닌 양 원장이 현직 국정원장과 만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는 지적이었다.
움츠릴 법도 했지만 양 원장 행보는 거칠 게 없었다. 양 원장은 6월 3일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지사를 연이어 만났다. 민주연구원과 서울연구원·경기연구원 간 업무 협약 체결 때문에 성사된 것이지만 이날 회동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박 시장과 이 지사 모두 여권잠룡으로 거론되는 까닭에서다. 양 원장은 김경수 경남지사, 오거돈 부산시장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장들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박 시장과 이 지사는 비문 진영 차기 주자군이다. 정치권에서 공공연히 나돌았던 이른바 ‘안이박김 살생부’에도 포함됐다. 반면, 양 원장은 친문계 핵심 인사이면서 대표적인 선거통이다. 양 원장과 둘의 만남을 두고 다소 성급하지만 차기가 거론되는 배경이다. 한 비문 의원은 “박 시장과 이 지사 모두 찾아온 양 원장을 크게 반겼다고 한다. 양 원장을 얻는다면 친문 지지를 받게 된다. 조직이 열세인 둘로서는 천군만마를 얻게 되는 셈”이라고 했다.
양 원장을 바라보는 민주당 의원들은 “역시 실세는 실세”라고 했다. 한 친문 의원은 “지금 양 원장과의 만남이 공개된 사람들을 봐라. 국정원장, 서울시장, 경기지사 등이다. 이 중 둘은 차기 대선 후보다. 당 싱크탱크 원장이 이해찬 대표나 이인영 원내대표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다”면서 “양 원장 아니었으면 가능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비문 의원도 “이쯤 하면 당에서도 쓴소리가 나올 법한데 감감무소식이다. 총선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양 원장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양 원장 일정과 동선을 따라가 보면 여권의 총선 및 차기 대선 전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수도권과 PK 방문은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경부선 벨트를 집중 공략할 것이란 전망과 맞닿아 있다. 박 시장과 이 지사와의 회동은 ‘포스트 문재인’을 대비한 여권 주류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엔 문 대통령 의중이 담겨져 있다는 게 중론이다. 또 다른 친문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의 양 원장 행보는 문 대통령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 대통령이 왜 이 시점에 선거 전문가이자 복심인 양 원장을 당으로 보냈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무엇보다 총선 승리를 통한 국정 동력 확보가 최우선 과제다. 동시에 민주당 친정체제를 다져놔야 한다. 임기 후반기 여당의 반란은 대통령 레임덕과 직결된다. 공천을 통해 민주당 체질을 개선할 것으로 보인다. 비주류인 박 시장이나 이 지사에게 손을 내민 것 역시 문 대통령 임기 후반기 또는 퇴임 후까지를 감안한 노림수다.”
자유한국당은 연일 양 원장을 향해 비판을 쏟아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국정원장을 호출해 몰래 뒤에서 나쁜 행동 하다 걸리니, 이제는 대놓고 보란 듯이 하고 있다”며 “박원순 시장과 이재명 지사가 청와대 말을 잘 듣는지, 총선에 협조할 것인지 살펴보라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든 거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나 원내대표는 “양 원장의 부적절한 행보에 말 한마디 못하는 여당의 부끄러움이, 여당을 어렵게 만들고 몰락하게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자유한국당이 이렇게까지 양 원장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민주당에선 ‘그만큼 양 원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더라. 어이가 없는 소리다. 민주당 총선 관련 업무를 맡은 대통령 최측근 인사가 국정원장과 대선후보급 광역단체장들을 만났다. 대통령이 선거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정의당에서도 양 원장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서훈 원장과의 만남이 알려진 후 정의당은 “촛불 기반 흔드는 심각한 사안”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여권에서조차 양 원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의원들과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답변을 꺼리거나 익명을 요구했다. 질문이 양 원장과 관련돼 있는 탓이었다. 어떤 의원은 “양 원장 얘기는 묻지도 마라”고 했다. 한 친문 의원은 “양 원장이 박 시장이나 이 지사를 만나러 가는 모습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았다. 무슨 대선 주자 면접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상을 주는 것 같았다. ‘실세 놀이’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의원들이 제법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문 관계자는 “양 원장한테 줄을 대려는 의원들이 있다고 들었다. (양 원장에게) 과도한 힘이 쏠리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양 원장 뒤에 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찬 대표만이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친문 내에서조차 양 원장을 두고 갈등이 벌어질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는 최근 들어 부쩍 빨라지고 있는 친문계 분화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동안 여권 주류라는 한 지붕 아래에 있었던 신친문, 친문, 친노 등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 원장이 급부상하자 각 계파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비주류 역시 마찬가지다. 한 비문 의원은 “핵심은 총선 공천이다. 친문 핵심부는 물갈이를 통해 당 지형을 새롭게 구축하고 장기집권 기틀을 마련하려 한다. 양 원장은 행동대장 격”이라면서 “공천 때까지 문 대통령을 등에 업은 양 원장 기세는 막강할 것이다. 그리고 칼을 휘두를 것이다. 이는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 그리고 여권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