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퀸’ 골퍼 이정은. 사진=브라보앤뉴
[일요신문] ‘메이저 퀸’ 이정은(23·대방건설)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우승상금 100만 달러(약 11억 7000만 원)를 받았다. 6월 7일 현재 이정은은 상금 135만 3836달러(약 15억 9000만 원)로 상금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세계 랭킹 5위, 올해의 선수 2위(83점), 평균 타수 4위(69.833타) 등 각종 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LPGA ‘루키’ 신분인 이정은은 투어 진출 후 9개 대회 만에 메이저 챔프의 반열에 오르며 이미 신인왕 수상을 예약했을 정도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016년 신인왕, 2017년 전관왕, 2018년 3관왕에 오른 후 LPGA 무대로 향했던 이정은은 KLPGA에서는 ‘이정은6’로, LPGA 투어 등록명도 ‘LEE6’로, 팬클럽 이름조차 ‘럭키 식스’로 정할 만큼 ‘6’이라는 숫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효녀 골퍼’로도 유명한 이정은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정은의 LPGA 투어 진출은 다른 선수들과 색깔을 달리했다. 지난해 11월,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LPGA 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에서 2주간에 걸쳐 4라운드씩 8라운드를 치르며 수석으로 LPGA 투어 자격을 따낸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정은은 미국 진출에 대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아직 준비가 안됐다. 국내 대회도 아니고 LPGA투어 아닌가. 내가 진심으로 미국에서 골프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판단을 유보했다. 또한 그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많은 걸 준비해서 나가야 한다. 레슨 프로, 트레이너, 마사지사, 매니저, 집, 차 등 팀으로 움직여야 한다. 준비 없이 등 떠밀려서 가고 싶지 않다. 제대로 준비를 마친 후 나가고 싶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후 이정은은 고민 끝에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기존 대행사 크라우닝과의 연장 계약 대신 세계적인 골퍼 박인비와 유소연 등 LPGA 선수 관리 경험이 많은 브라보앤뉴를 선택했다.
크라우닝은 이정은이 2015년 국가대표에 선발됐을 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이정은의 성장을 도왔다. 이정은의 미국 진출을 앞두고 내심 재계약을 희망했던 회사 입장에서는 이정은이 브라보앤뉴와 계약한 부분에 아쉬움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터. 그럼에도 크라우닝은 이정은의 선택을 존중했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크라우닝의 우도근 이사는 이정은과의 이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정은 프로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고 애써 위안 삼았다. 크라우닝은 LPGA 투어 선수를 지원한 경험이 없는 터라 이정은 프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선수의 선택을 따랐고, 이 프로도 회사 관계자들과 마지막 식사까지 하고 헤어질 만큼 이별을 마음 아파했다.”
우 이사는 이정은이 LPGA에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정착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한다.
“워낙 멘탈도 강하고 승부 근성이 있는 선수라 꾸준히 성적을 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LPGA 첫 우승을 메이저대회로 장식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 점들이 이정은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좋은 출발을 하고 있는 만큼 LPGA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길 바랄 뿐이다.”
‘현명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골퍼 이정은. 사진=브라보앤뉴
한편 이정은과 새로운 인연을 맺은 브라보앤뉴의 이수정 이사는 이정은의 장점으로 현명함을 꼽았다.
“박인비, 유소연 등 여러 골프 선수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이정은 프로의 장점은 굉장히 스마트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의 방향을 설정해주면 그 이상을 끌어낼 줄 안다. 이 프로의 멘탈 트레이닝을 맡고 있는 정그린 대표도 선수의 영리함이 단단한 멘탈을 형성한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영리함의 배경은 학교 수업이었다. 박인비, 유소연 프로도 학교 생활에 충실했고, 부모님들이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이 프로도 수학여행까지 참석할 정도로 학교 수업에 충실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이 이사는 외동딸인 이정은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걸 가장 힘들어했다고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아버지 이정호 씨는 이정은이 4살 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딸을 뒷바라지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성장한 이정은은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이 프로를 미국에서 뒷바라지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이 프로의 걱정과 염려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이 프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멘탈 코치, 캐디, 매니저 등으로 구성된 좋은 팀을 짜는데 모든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통역은 물론 운전까지 담당하는 매니저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프로에게 적합한 매니저를 찾느라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 이 프로 옆에는 동갑내기로 시카고대 골프부 출신인 제니퍼 김이 전담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는데 두 사람의 케미가 아주 좋은 편이다.”
한국에서 부모님의 건강과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투어 생활을 거듭했던 이정은은 LPGA 무대를 동갑내기 매니저와 동행 중이다. 더 이상 경제적인 부담 없이 먹고 싶은 거 먹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고 있는 그는 투어 생활을 여행하듯이 즐기고 있다고.
“이 프로는 처음으로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 없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매니저와 투어 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니고 짧은 여행을 다니며 LPGA 생활을 지루하지 않게 이어간다. 이 프로는 다른 선수들이 힘들어하는 장거리 비행과 호텔 생활을 오히려 즐기는 편이다. 체력이 뒷받침해주니 그런 여유도 생기는 것 같다. 얼마 전 이 프로가 그런 말을 했다. 15년 골프 인생 중 지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이다.”
이정은에게 가장 큰 동기부여를 해주는 이는 바로 ‘부모님’이다. 사진=브라보앤뉴
같은 소속사의 박인비, 유소연도 이정은 챙기기에 열심이다. 박인비는 지난 2월28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LPGA 투어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을 앞두고 이정은과 따로 식사를 했고, 유소연은 5월 28일 이정은 생일을 맞아 골프장 클럽하우스 라커 안에 생일 케이크를 넣어두는 걸로 축하를 대신했다. 이수정 이사는 이정은의 생활 태도가 매우 성실한 편이라고 말한다.
“이 프로는 선후배들을 잘 챙기고 사람들을 대할 때 겸손하면서도 진심으로 대한다. 그래서 이 프로를 좋아하는 선수들이 많은 것 같다. 어려움을 겪고 성장해온 선수라 그런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면이 있다.”
이정은은 US오픈 우승 후 폭풍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위해 헌신해 온 한국의 부모를 떠올렸다. 아무리 LPGA 투어를 즐기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한테 부모는 보고 싶고 그리운 대상이다. 이전 이정은과 인터뷰했을 때 그는 ‘소녀 가장’으로 살아온 삶을 이렇게 풀어냈다.
“아버지가 사고로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날 뒷바라지 해주셨다. 아버지의 불편한 모습을 보고 골프를 했기 때문에 내가 잘해야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우승을 하고, 방송을 타고, 상금을 챙기면서 조금씩 가정 형편이 나아지는 걸 실감했고, 가족들도 이전보다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게 굉장한 동기부여가 된다. 가끔은 내가 부모님께 의지하고 기대기보단 내가 부모님을 안아줘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안아줄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골프를 더 잘 치고 싶다. 부모님을 오랫동안 안아드릴 수 있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골프 선수가 아닌 레슨 프로를 하기 위해 골프를 배웠던 이정은이 LPGA US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장면은 골프 팬들에게 표현 못할 희열을 느끼게 해줬다. 박인비, 유소연, 박성현과는 또 다른 휴먼 스토리의 주인공, 이정은의 두 번째 우승을 기대해본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LPGA 1세대 트렌드는 ‘바짓바람’ 2019년 트렌드는 ‘전담팀’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등이 활약했던 LPGA 1세대들의 특징은 ‘바짓바람’이었다. 딸의 미국 투어 생활을 위해 아버지들이 현지에서 직접 뒷바라지에 나서며 운전기사, 매니저 역할을 도맡았다.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 씨는 딸의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박지은 아버지 박수남 씨도 딸의 ‘그림자 수행’으로 유명했다. 그중 김미현의 아버지 김정길 씨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장만한 밴으로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은 물론 차 안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잠을 자는 등 온갖 고생을 했던 경험이 회자되었다. 한 유명 골프 선수의 아버지는 미국 생활 초반 알파벳도 제대로 몰라 운전을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골프 선수인 딸이 운전대를 잡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LPGA 투어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은 어떤 형태로 움직일까. 부모가 대회 때마다 방문해 라운딩을 지켜보며 현장에서 응원전을 펼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담 매니지먼트사에서 팀을 꾸려 선수들을 지원한다. 전담 캐디와 스윙 코치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트레이너, 멘탈 코치, 스윙 코치, 전담 매니저, 퍼팅과 쇼트 게임 코치 등 역할이 세분화돼 있는 게 특징이다. 박성현은 LPGA 데뷔 첫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집을 구했고 스윙코치와 트레이너, 캐디, 영어강사 등으로 구성된 전담팀을 꾸렸다. 세계적인 교습가로 유명한 브라이언 모그 코치로부터 쇼트 게임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전인지도 스윙 코치, 멘탈 코치, 매니저, 캐디 등으로 구성된 전담팀과 함께 한다.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투어 생활에서 자신을 돕는 전담팀은 선수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의 이야기. 유소연은 LPGA 데뷔 초 대규모의 전담팀을 꾸렸다. 심리학자, 트레이너, 치료사, 매니저 등이 투어에 동행했는데 적응을 마친 지금은 매니저 없이 캐디하고만 함께 한다. 반면에 박인비는 남편인 남기협 코치가 그의 퍼팅 코치이자 스윙 코치의 역할을 대신한다. 남편, 캐디, 물리 치료사 등이 박인비의 동반자들인데 박인비는 그들과 여행하듯이 투어를 다니고 있다고. 고진영은 LPGA 데뷔해에 스윙, 퍼팅, 피트니스, 멘탈 코치 등 대규모의 전담팀을 구성했지만 많은 인원이 오히려 투어 생활하는데 부담을 안겨줬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은 캐디와 매니저로 심플하게 구성된 팀이 고진영을 돕는다. 올 시즌 LPGA 첫발을 내디딘 이정은도 전담팀이 형성돼 있다. 매니저, 캐디, 피지컬 트레이너, 멘탈 코치, 스윙 코치가 그를 돕고 있고 영어 회화를 위해 캐나다 교포와 화상 통화로 수업을 받고 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