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U-20 축구대표팀 정정용 감독. 사진=연합뉴스
[일요신문] 우승의 문턱에서 패배의 쓴맛을 봤다. 하지만 ‘2019 폴란드 U-20 월드컵’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은 파죽지세로 결승전에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중심엔 ‘U-20 대표팀의 아버지’ 정정용 감독이 있었다.
6월 16일 폴란드 우쯔에선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U-20 월드컵’ 결승전이 펼쳐졌다. 한국은 이강인의 선제골과 함께 기분 좋게 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탄탄했다. 우크라이나는 실점 이후 3골을 몰아치며 3대 1 승리를 거뒀다. ‘2019 U-20 월드컵’ 우승트로피는 우크라이나의 차지였다.
경기를 마친 뒤 정 감독 목소리엔 짙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선수들이 준비한 전략을 그라운드 위에서 잘 보여줬다. 경기에 진 건 감독이 부족한 탓이다.” 우크라이나와의 결승전을 마친 뒤 U-20 대표팀 정정용 감독이 밝힌 소감이다. 정 감독은 대회 마지막까지 선수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진정한 리더’의 면모를 보였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한 정 감독에게서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이유였다.
우승컵을 향한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정용호의 위대한 도전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도전은 아름다웠다. 그 자체로 정정용호의 ‘U-20 월드컵’은 해피엔딩이었다. U-20 태극전사들은 5월 25일부터 20여일 간 국민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 결과만큼 완벽했던 과정, 그 이면엔 ‘정정용 리더십’
정정용 감독과 U-20 태극전사들. 사진=연합뉴스
‘2019 폴란드 U-20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축구사에 남을 만한 대이변을 일으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언더독’은 대서사시의 마지막 무대에 섰다. 한국의 선전은 전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한국이 ‘결승 진출’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 이면엔 ‘완벽한 과정’이 있었다. 흔히 ‘성적지상주의’라 부르는 스포츠계의 관행은 정정용호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한국 대표팀은 승리보다 즐거움에 초점을 맞췄다. 선수들은 ‘이기는 축구’가 가장 즐겁다는 것을 자각했고, 스스로 동기를 부여했다. 과거 지도자로부터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사고를 일방적으로 주입받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뿐 아니다. 한국 선수들은 역사를 쓰기보다 추억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8강전에서 세네갈을 꺾은 뒤 이강인은 “대표팀 형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결국, 선수들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추억은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
정정용 감독의 지도자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 감독의 철학은 끈끈한 라커룸 분위기로 이어졌다. 좋은 과정이었다. 그 과정은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좋은 과정은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정 감독은 한국 유소년 축구에 필요한 핵심을 “선수개인 능력 발전”이라고 짚었다. 그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하면, 국제대회에서 한국 축구의 경쟁력은 사라질 것”이란 목소리를 낸 몇 안되는 지도자였다.
2018년 4월 정 감독은 “한국 학원 스포츠는 이기는 축구에 집중한다. 조직력-체력을 우선하는 성적지상주의가 만연해 있다”면서 “하지만 조직력-체력으론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중요한 건 1대 1 능력”이라며 한국 축구의 시스템적 맹점을 꼬집기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정 감독은 성적을 통해 자신의 철학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한국 대표팀은 뛰어난 개인 능력을 바탕으로 ‘U-20 월드컵’에서 전대미문의 고지에 올랐다.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정 감독이 성적으로 ‘성적지상주의’를 정면 반박하는 모양새를 띤 까닭이다.
# ‘덕장’인줄 알았는데…‘지장’의 매력까지 뽐낸 전략가
‘원팀’ 정정용호. 사진=FIFA
한국 U-20 대표팀은 정정용 감독을 믿고 따랐다. 정 감독은 따뜻한 리더십으로 팀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정 감독은 전형적인 ‘덕장’ 스타일이었다.
‘덕장’ 정 감독은 이번 대회를 통해 ‘지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다. 정 감독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적 변화를 통해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했다.
정 감독의 전술적 역량이 빛난 경기는 16강 일본전이었다. 16강 전반전에서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수비 일변도’ 전략을 펼쳤다. 단순해 보이는 전략엔 고도의 전술이 녹아들어 있었다.
16강전 전반전. 일본의 볼 점유율은 80%에 달했다. 일본은 전형적인 패스 축구로 한국을 몰아 붙였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일본의 패스가 ‘겉돌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공을 오래 잡고 있기만 했을 뿐 효율적인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전략은 주효했다. 후반전 한국은 체력적 우위를 선점했다.
‘전반전을 버린’ 한국 대표팀은 후반전 놀라울 정도로 다른 팀컬러를 선보였다. 한국은 과감한 공격으로 일본을 몰아세웠다. 결국 오세훈의 헤딩 결승골이 터지며, 한국은 8강전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도 정 감독의 전술적 역량은 빛났다. 정 감독은 체력안배와 경기결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이날 ‘깜짝 카드’로 선발 출전한 김세윤과 고재현은 에콰도르 수비진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한국은 1 대 0으로 승리했다. 동시에 정정용호는 결승전에서 활용할 선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번 대회 정 감독은 상대 팀을 고려한 ‘맞춤형 전략’으로 효율적인 경기를 펼쳤다. ‘맞춤형 전략’은 효율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조별리그부터 한국은 ‘한끗 차이’로 연전연승했다.
감독의 전술이 빛을 발하자, 코칭스태프를 향한 선수단의 믿음은 더욱 두터워졌다. 정 감독은 선수단 믿음에 ‘격려’로 화답했다. 토너먼트를 거듭할수록 한국 U-20 대표팀은 ‘더욱 강력한 원팀’으로 진화했다.
# 축구계 “이젠 장기적 안목으로 ‘제2-제3의 정정용’ 발굴해야…”
정정용 감독이 훈련 중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뒤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 정정용 감독은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연합뉴스
MBC SPORTS+ 이상윤 해설위원은 ‘U-20 월드컵’ 기간 내내 흐뭇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위원은 “정말 각본 없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우리 어린 태극전사들이 똑똑히 보여줬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 위원은 정정용 감독에 대해 “정말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메워주는 팀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정정용 감독의 노고가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은 목청이 터질 듯이 애국가를 부르는 선수단 분위기에도 주목했다. 그는 “애국가를 크게 부르는 것이 사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대단한 장면이라고 본다. 선수들의 열정적인 애국가 제창은 대표팀뿐 아니라 국민들까지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정용호는 정말 판타스틱한 팀”이라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어 “정정용 감독뿐 아니라 U-20 대표팀 모두가 넘버원”이라고 덧붙였다.
축구계 일각에선 걱정어린 시선이 나오기도 한다. 정정용 감독의 ‘선진 철학’을 계승할 만한 지도자가 존재할지 여부에 대한 걱정이다. 축구인 A 씨는 정정용 감독과 관련해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면서 “정 감독은 축구계 ‘비주류’로 자신만의 철학을 고집해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정 감독의 성공은 한국축구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스타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계엔 좋은 지도자가 많다. 이들을 발굴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 중엔 ‘비주류’라는 이유로 묻혀가는 지도자가 적지 않다. 이젠 장기적 안목으로 ‘제2, 제3의 정정용’을 발굴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한국 축구의 U-20 월드컵 신화는 원히트 원더가 될 것이다.” A 씨의 지적이다.
축구 지도자 B 씨는 “지난해만 해도 정정용 감독은 베트남전 졸전으로 비판받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결과가 어떤가. 정 감독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정 감독은 꾸준히 유소년 축구를 지도해 온 ‘유소년통’이다. 여기에 정 감독은 ‘성적지상주의’를 지양한다. 그간 성적으로 인한 심적 고통은 말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B 씨는 이어 “그렇기에 정 감독이 대단한 것이다. 지도자가 철학과 비전을 실현하려면 꾸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정정용’은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극전사들의 U-20 월드컵 신화는 한국 국민들을 열광케 했다. 한국 축구에 있어 지난 한 달은 ‘축제’와 같은 시간이었다. 정정용 감독을 필두로 한 한국 대표팀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역사를 썼다. 그리고 이제 축제는 막을 내렸다.
‘정정용 리더십’이 한국 축구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정정용호는 승리보다 즐거움, 역사보다 추억에 초점을 맞췄다. 정정용호의 철학은 기존 한국 축구가 외치던 ‘성적지상주의’의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 결과는 대단했다. 정 감독은 경기력을 통해 한국 축구에 필요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역설했다.
‘유소년 축구 지도자’로 외길인생을 걸어온 정 감독은 자신의 철학을 관철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지도자를 육성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정정용 리더십’이 한국 축구에 던진 화두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