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TV’에서 제작한 일본판 ‘시그널’(위)과 ‘tvN’의 한국판 ‘시그널’(아래)
# 한국판 장르물이 대세
그간 일본 시장은 한국의 멜로물에 열광했다. 특히 일본의 드라마 주시청층인 중장년층 여성들이 한국 남성 특유의 달콤하고 배려 넘치는 모습에 반했고, 많은 한류스타가 탄생했다. 하지만 최근 리메이크 추세를 보면 탄탄한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한 장르물이 대세다.
배우 조진웅, 김혜수, 이제훈 등이 출연한 tvN ‘시그널’은 지난해 후지TV ‘시그널 장기 미제 사건 수사반’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돼 화제를 모았다. 일본판에는 유명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 키치세 미치코, 키타무라 카즈키가 참여했다. 리메이크된 시그널은 일본에서도 물샐 틈 없는 전개와 배우들의 호연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후지TV는 KBS 2TV 드라마 ‘굿 닥터’의 동명 리메이크작으로도 톡톡히 재미를 봤다.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청년이 완연한 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2017년 미국 ABC에서 리메이크된 데 이어 일본에서도 다시 만들어져 연거푸 성공을 거뒀다. 한국 팬들에게도 익숙한 우에노 주리, 야마자키 켄토 등이 출연해 일본판이 역으로 한국에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일본 ‘후지TV’는 KBS 드라마 ‘굿 닥터’도 리메이크했다.
이들 작품의 성공은 일본에 한국형 장르물 리메이크 붐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세 번째 시리즈가 방송되고 있는 소리추적스릴러 OCN ‘보이스’는 닛폰TV ‘보이스 110긴급지령실’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일본에서 인기 수사물을 연출한 오타니 타로와 쿠보타 미츠루가 메가폰을 잡아 현지에서도 기대감이 높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TV아사히는 배우 박신양이 주연을 맡았던 SBS 드라마 ‘싸인’을 리메이크한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가는 법의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싸인-법의학자 유즈키 타카시 사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된다. ‘싸인’은 ‘시그널’ ‘쓰리데이즈’로 알려진 김은희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다. ‘시그널’의 리메이크작이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김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일본 드라마 시장의 관심이 커졌다는 후문이다.
이 외에도 배우 이준기, 김소연이 출연했던 MBC 드라마 ‘투윅스’ 역시 리메이크된다. 이 드라마는 살인 누명을 쓴 남자가 백혈병에 걸린 딸을 구하기 위해 2주 동안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 유명 배우 미우라 하루마가 주연을 맡아 오는 7월 일본 후지TV와 K TV 등에서 방송된다.
일본 시장에 정통한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이처럼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가 연이어 리메이크되는 것은 이례적”이라며 “‘시그널’ ‘굿 닥터’ 등 리메이크작이 성공을 거두자 한국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 왜 역전 현상이 일어났나?
일본 드라마는 한국 방송가의 단골 리메이크 소재였다. 국내에 일본 드라마를 좋아하는 마니아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유명 드라마에 한국 배우들을 출연시켜 다시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도 홍보 효과가 컸다.
2007년 방송된 MBC 드라마 ‘하얀거탑’이 대표적이었다. 안판석 PD가 연출한 이 작품은 병원을 배경으로 삼은 정치드라마라는 평을 받으며 김명민, 이선균 등을 스타덤에 올렸다. 이후 이민호, 김현중 등 걸출한 한류스타를 배출한 ‘꽃보다 남자’를 비롯해 ‘직장의 신’ 등이 일본 드라마를 다시 만들어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하지만 이후 일본 드라마를 바탕으로 한 리메이크작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빅히트를 기록한 ‘노다메 칸타빌레’는 KBS 2TV ‘내일도 칸타빌레’로 재탄생됐으나 흥행에 참패했고, MBC ‘여왕의 교실’, SBS ‘수상한 가정부’, tvN ‘마더’ 등도 배우들의 호연은 돋보였지만 별다른 성과는 내지 못했다.
동명 일본 드라마가 원작인 SBS 드라마 ‘절대 그이’
이런 분위기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KBS 2TV ‘최고의 이혼’, JTBC ‘리갈하이’ 등이 일본 원작 인기가 무색할 만큼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현재 방송 중인 SBS ‘절대 그이’ 역시 최근 가장 각광받는 배우인 여진구를 내세웠지만 1∼3% 시청률을 전전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 중견 외주제작사 대표는 “한국과 일본이 같은 동양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리메이크하기 좋다는 생각이 만연했다. 하지만 양국의 대중이 갖는 디테일한 정서의 차이를 포착하지 못해 결국 실패한 리메이크작이 양산되고 있다”며 “이런 분위기라면 향후 일본 드라마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하는 사례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일본 드라마 시장에 한국 드라마 리메이크는 새로운 활로가 됐다. 내로라하는 한류스타들이 출연하는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드라마는 일본 드라마 시장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콘텐츠다. 때문에 여전히 한류 로맨틱 코미디, 멜로 드라마는 활발히 수출되고 있다. 반면 배우의 이름값보다 연기력을 우선시하는 스릴러와 미스터리 같은 장르물의 경우 굳이 한류스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또 다른 방송 관계자는 “드라마 해외 수출은 출연 배우의 면면이 가장 중요하다. 연기력은 좋지만, 해외에서 유명하지 않은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는 고가에 수출되기 어렵다”며 “이런 경우 스토리를 수출해 현지에서 리메이크하는 전략이 한국과 일본 모두 윈윈(win-win)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