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바 브로커 유상봉 씨가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진정을 제기했다. 연합뉴스
김학의 별장성접대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5월 사정기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유상봉 씨 이름이 거론됐다. ‘검찰이 코너에 몰린 때를 놓치지 않고 유 씨가 또 잽을 날렸다’는 말부터, ‘시점이 너무 공교롭다’며 진정의 배후를 의심하는 말들도 나돌았다. 유 씨가 서울동부지검에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진정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4월 제기된 진정을 바탕으로 원 청장을 내사 중이라고 밝혔다.
유 씨의 진정서 제출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찰은 이미 해당 사건에 대한 수사가 상당히 진척됐다고 밝혔다. 이 수사는 유 씨의 진정 사건이 아닌 이재명 경기지사의 변호인 백종덕 변호사가 고발장을 제출한 게 그 발단이다. 백 변호사는 2018년 11월 유 씨로부터 옥중 서신을 받고, 그를 대리해 고발장을 제출했다. 고발장에는 허경렬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과 유현철 분당경찰서장의 뇌물수수 혐의가 담겼다. 유 씨가 제기한 진정과 고발건은 동부지검으로 이첩돼 검찰 지휘 아래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서 수사 중이다.
의혹을 받는 경찰 고위직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원 청장은 언론 보도가 이뤄진 다음날 유상봉 씨를 무고죄로 고소했다. 10여 년 전 사건이라 공소시효를 따져 볼 여지가 있고, 진정인 진술의 신빙성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그럼에도 경찰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로서는 최근 경찰유착 사건이 연이어 터진 데다, 경찰 2인자인 원 청장을 비롯 최고위직이 줄줄이 거론된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함바비리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기소된 브로커 유상봉 씨가 2011년 강희락 전 경찰청장에게 돈을 건넸다는 서울 광화문 일대 커피숍 등지에서 열린 현장 검증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불거진 ‘유상봉 함바게이트’는 경찰 입장에서 악몽이다. 이 사건으로 경찰청장, 청와대 감찰팀장, 지자체까지 불똥이 튀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감찰팀장은 의혹이 제기되고 하루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밖에도 고위공직자의 뇌물수수 의혹이 줄줄이 제기됐지만 특히 경찰의 타격이 컸다. 강희락 전 경찰청장은 2009년 민원해결과 특혜, 인사청탁 등을 대가로 유 씨로부터 1억 7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 강 전 청장 외에도 지방경찰청장 여럿이 기소됐다. 또 총경급 이상 200여 명이 뇌물수수 의혹을 받았다.
브로커 유 씨는 부산과 서울 등지에 사무실을 두고 전국단위로 활동해왔다. 회사이름은 ◯◯유통, △△푸드 등으로 식품유통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국 각지에 5개의 법인을 세운 유 씨는 사실상 경영을 총괄하는 회장의 역할을 했다. 아파트, 터널, 발전소 등 대형 공사 현장에 인부들 식사를 대는 ‘함바식당’ 운영권을 따주는 게 유 씨의 직업이다.
브로커와 공직자의 뇌물수수는 함바 피해자가 속출하며 수면 위로 드러났다. 유 씨는 고위공직자, 시행사, 시공사 임직원 등을 상대로 로비를 하고 수주가 가능해지면 함바운영 희망자(매수자)를 모집했다. 매수자를 모아 계약금을 받고 실제 식당을 개설하는 방식으로 브로커 업무가 진행됐다. 함바 수주가 결렬되면 또 다른 함바운영 자리를 알아봐주는 식으로 매수자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그렇지만 로비자금을 모아 로비를 하고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차례 수주가 불발되며 계약금만 날리게 된 피해자가 속출했다. 피해자들은 함바운영권을 명목으로 유 씨에게 3억~10억 원까지 지급했다.
유 씨가 매수자들에게 고위직과의 관계를 자랑하며 수주에 자신감을 내비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유 씨와 경찰의 유착이 사실로 드러난 것. 유 씨는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과의 인맥을 바탕으로 경찰청 청장실을 드나들 정도였다. 강 전 청장을 통해 지방경찰청장을 소개받고, 다시 건설현장의 관할 경찰서장을 소개받는 식으로 인맥을 넓혔다. 유 씨가 경찰인맥 확보에 사활을 건 것은 경찰의 정보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재판 과정에서 유 씨가 특히 ‘정보경찰’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건설현장에 관련한 민원을 통제하거나 사업에 유리한 관련 정보를 얻는 데 정보경찰을 활용했다.
로비의 달인답게 유 씨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다. 모든 로비는 ‘독대’로 이뤄졌다. 로비 상대에 따라 철저하게 ‘급’을 나눠 뇌물액수를 차별화했다. 경찰청장에게는 1회당 500만 원, 지방경찰청장에게는 300만 원과 같은 식이다. 또 뇌물은 유 씨가 직접 인출하고, 현금뭉치를 봉투에 담아 전달한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2011년 검찰은 뇌물수사로 애를 먹었다. 로비를 제공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었다. 유 씨의 통화목록, 현금인출기록, 뇌물수수 상대방의 알리바이를 위주로 증거가 제출됐다.
다만 당시 수사에서는 유 씨의 ‘수첩’이 살생부 노릇을 했다. 여기엔 1000여 명에 가까운 고위공직자, 정관계 인사의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져 있다고 알려졌다. 유 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뇌물 리스트를 기억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전성기로 활동하던 2007~2009년 유 씨가 현금을 인출한 금액만 200억 원이 넘는다. 이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