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감독은 50년에 가까운 지도자 생활을 이야기하며 여전한 축구 열정을 비쳤다. 임준선 기자
[일요신문]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청소년 대표팀은 대한민국 최초 FIFA 주관 대회 4강에 오르는 대기록을 남겼다. 당시 해외 언론들이 대표팀을 보고 지은 붉은 악마(Red Furies)는 현재까지도 대표팀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36년 전 어린 선수들을 이끌고 세계 무대에 도전했던 박 감독은 까마득한 후배들이 자신의 기록을 뛰어넘은 2019년 현재, 팔순이 넘은 노감독이 됐다. 아직까지도 직접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그는 이번 2019 U-20 월드컵을 보며 36년 전을 수 차례 떠올렸다. “즐거운 추억을 후배들이 다시 생각나게 해줘 고맙다”는 그를 ‘일요신문’이 만나봤다.
#1983년 4강의 추억
막내 손주보다도 10살 가까이 어린 후배들의 활약에 최근 그를 찾는 언론이 많아졌다. 박 감독은 “방송국에 친한 후배놈이 있는데 하도 부탁을 해서 내일도 촬영 하나 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부탁을 해오는 통에 아주 피곤하다”면서도 “그 옛날 멕시코 갔다 왔을 때는 이보다 훨씬 더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 내리면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한 시간씩 지체되곤 했었다. 인터뷰 같은 것도 거의 다 고사했다”고 말했다. 그 시절 본지 발행인과 어렵게 성사된 ‘목욕탕 인터뷰’에 대해 언급하자 “그 분이 연세가 많은가”라고 되물었다. ‘적지 않다’는 대답에 “그런 적도 있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성공의 뒤에는 혹독한 훈련이 있었다. 그는 “지금도 제자들이 가끔 만나면 ‘선생님, 그 때처럼 훈련하면 지금은 한 놈도 할 놈이 없어요’라고 한다(웃음). 지금 내가 지도하는 팀(여주시민축구단) 아이들한테도 농담으로 ‘그 애들(1983년 청소년 대표팀) 5분의 1만 너희들한테 시켜도 다 도망갈거다’라고 말해준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가 고안한 ‘마스크 훈련’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조별리그 3경기 중 2경기가 열린 멕시코 중앙의 톨루카는 해발 3000km에 달하는 고지대였다. 박 감독은 “아침 훈련 때 40분, 50분도 끄떡 없이 뛰던 놈들이 마스크를 씌우니까 10분도 못 뛰고 나가 자빠졌다. 10분, 15분, 20분으로 차츰 늘려서 35분까지 뛸 수 있게 만들고 멕시코로 갔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박 감독은 ‘4강 신화’를 써내려 간 대회에 참가조차 못 할수도 있었던 비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대회 본선 참가를 만류했다는 것이다.
“그 때 협회에서 선수들을 보내지 말라고 했었다. ‘실력이 없어서 망신당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배우러 가야하는 대회다. 우리는 본선 진출권도 있는데 그걸 못 가게 하는 게 어느 나라 법이냐’고 따지고 들었다. 어린 나이지만 부회장단 등 협회 사람들 앉혀놓고 대판 싸웠다. 결국 기자들 불러서 기자회견 하겠다고 난리를 치니 마지못해 보내줬다.”
박 감독은 36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서 “그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고 수 차례 반복했다. 대표팀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현지에서 저녁마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했던 사연도 전했다.
“선수 한 명당 쌀 다섯 되씩 나눠주고 싸들고 갔다. 선수들에게 저녁은 한식으로 직접 해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시장에 나가면 돼지든 소든 고기가 싸더라. 소족을 3만원 어치 사면 열개가 넘었다. 하루 종일 그걸 고아서 국물을 먹였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숙소의 식당 한 쪽을 얻어 시작된 박 감독의 ‘요리사 생활’은 대회 기간 내내 계속됐다. 하지만 대회가 진행되며 그 ‘위상’은 달라졌다. 그는 “처음엔 거기 직원들이 내가 요리사인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멕시코도 때려잡고 호주도 때려잡고 하니 현지 신문에 기사가 났다. 그 신문이랑 나를 번갈아보더니 그제서야 내가 감독인 것을 알아봤다”면서 “그 다음부터 냉장고 다 열어놓고 필요한 재료를 다 갖다 쓰라고 하더라. 그때부터 걔들 사인 해주고 사진 찍어주고 입던 옷도 벗어주고 인기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1-2로 석패한 36년전 4강전을 떠올리며 여전히 분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임준선 기자
사상 최초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역사를 써 내려가던 박 감독과 대표팀은 4강에서 브라질을 만나 1-2로 무릎을 꿇었다. 둥가, 베베토 등 이후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선수들을 만나 선제골까지 넣었다. 하지만 이내 2골을 내주며 대회 우승국이 된 그들을 넘지 못했다. 박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먼저 골을 넣고 잘 뛰었는데 우리 애들이 참 불쌍했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FIFA 회장이 브라질 출신 주앙 아벨란제였다. 경기 시작 전에 지들 선수하고만 악수를 하고 심판들 얼굴도 톡톡 쳐주면서 우리 애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피파 회장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우리가 얼마나 불이익을 보겠나. 그런 형편에서 경기를 했다”면서 “브라질 놈들이 우리를 잡아다가 거의 반 죽이는데 파울하나 안 불어주더라. 그때 생각하면 애들이 불쌍하다”고 전했다.
#‘스타 감독’이 경기 여주에 자리 잡은 사연
1983년 멕시코에서의 성공 이후 박 감독은 스타덤에 올랐다. 이전까지 아마추어급 무대(서울시청 축구단 감독)에서 활동하던 그는 연이어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고, 1989년부터는 일화 천마가 창단하며 프로에 입성했다. 프로무대 3연패를 달성했고, 이후 대구 FC와 성남 FC의 창단 감독을 지냈다. 지난해부터는 ‘K3리그 베이직’에서 새롭게 창단한 여주시민축구단 총감독을 맡아 선수들과 호흡하고 있다. “나는 다른 감독이 하던 팀을 이어서 맡는 것 보다 창단 팀에서 내 스타일을 입히는 것을 선호한다”는 박 감독은 “여주시에서 팀을 만들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관계자들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통에 여기까지 오게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있던 무대에 비해 세미프로리그인 K3는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박 감독은 “선택을 놓고 망설이기도 했다. 다른 곳에서도 오라는 요청도 있었다”면서 “그래도 새로 창단하는 팀의 어려움도 알고 나를 꼭 원한다는 말에 왔다”고 말했다.
팔순이 넘은 고령의 감독을 여주까지 이끈 것은 축구 열정이었다. 그는 선수단 숙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떤 후배들은 ‘계속 경쟁을 하는 것이 지겹다’면서 축구에서 멀어지기도 하는데 나는 전혀 지겹지 않다”면서 “여전히 축구가 재밌다. 내가 자신있고 좋아하는게 바로 축구”라고 밝혔다.
박 감독은 고령에도 운동장에서 몸소 시범을 보이며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는 “아직 건강에는 무리가 없다”면서 건강의 비결로는 소식을 꼽았다. 박 감독은 군살 없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동기들 중에 반 정도는 갔다(사망). 나머지도 지팡이 짚고 다니는 친구들도 많다”면서 “나는 특별히 관리하는 것은 없는데 소식 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밥 한 그릇을 다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일부러 적게 먹는 것은 아니고 원래 먹는 양이 적었다”고 설명했다. ‘약주는 하시냐’는 질문에는 “좋아한다.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먹는다. 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고 화색을 띄며 말했다.
박 감독은 팔순이 넘는 고령에도 몸소 선수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열정을 보였다. 임준선 기자
팀에서의 목표로는 승격을 꼽았다. K3리그는 팀 수가 늘어나며 ‘어드밴스’와 ‘베이직’ 상하위 리그로 나뉘어 있다. 박 감독은 “올해 승격을 하는 게 목표다. 올해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년엔 100%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며 여전한 승부욕을 과시했다.
‘여전히 축구가 좋다’는 그에게 앞으로 바라는 바를 물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 나이에 바라는 게 뭐가 있나. 여기서 마무리 잘 짓고 축구 발전에 작게나마 힘을 보탤 수 있으면 한다”고 답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