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전권특사 풀리코 프스키(오른쪽)과 전용객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니터 에는 이동지역과 속도가 표시돼 있다. <동방특급열차> | ||
당시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국제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경호문제 때문에 보안상 밝혀지지 않았던 뒷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당시의 궁금증을 풀어줄 책 한 권이 번역돼 소개됐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전권특사로서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내내 그를 수행한 풀리코프스키가 쓴 <동방특급열차>(성종환 역·중심 출판사).
그는 여기에서 ‘달리는 집무실’ 김정일의 전용열차와 그의 경호원들, 그리고 김정일과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회담 상황, 남북 정상회담에 얽힌 일화 등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김정일 러시아 열차 방문의 뒷이야기들을 따라가봤다.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 방문 때 이용했던 전용열차는 폭탄테러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특수 제작된 방탄·방폭 열차로 당시 언론들이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일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풀리코프스키가 밝히는 ‘방탄열차’에 얽힌 비밀.
“(당시 언론은) 모든 객차가 방탄용 철판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철도 장비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 객차들은 그저 평범한 일반 차량일 뿐 방탄용 철판이 깔린 것은 김정일 전용칸의 바닥뿐이었다. 필시 사다리꼴 지붕으로 덮여 있고 작은 창문과 총안이 나 있는 객차의 모양 때문에 기자들이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디젤발전기에 불과했다.”
김 위원장 특별열차는 ‘달리는 집무실’로 불릴 정도로 각종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최첨단 통신설비에 침실 집무실 연회실 회의실 식당 등이 총망라돼 있다. 한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열차는 시속은 150∼180km 정도이며 ‘달릴 때 고뿌(컵의 일본식 발음)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요동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터넷 등 컴퓨터 통신을 이용해 평양의 집무실에서처럼 업무가 가능한 정도라고 한다. 다음은 풀리코프스키가 밝히는 열차 인테리어에 관한 또 다른 비밀.
“전용열차의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얘깃거리가 아주 많다. 모든 것이 우아하고 멋있게 단장되어 있었으며 매우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회담 전용칸에는 두 대의 대형 평면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영화 감상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자지도였다. 아마 위성을 통해서 열차의 이동 경로가 추적되어 이 지도에 표시되는 듯했다. 지도에는 우리의 이동 경로, 실외 온도,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각 주와 지방의 경제 현황 등이 나타났다.
전용열차에는 위성통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각 객차마다 컴퓨터가 설치되어 공동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었다. 전용열차의 각 객차는 9개의 침실로 분할된 러시아의 객차와는 달리 5개의 1인용 침실로 나뉘어 있어 객차 내의 생활이 매우 편안했다.”
▲ 외부에 최초로 공개된 김일성가족의 사진. 왼쪽이 김정일. | ||
특별 열차의 나머지 차량은 김정일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이 이용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김정일의 수행 비서로 풀리코프스키가 김정일을 만날 때마다 항상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열차에는 또한 노래만을 전담하는 ‘승무원’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러시아 방문 중 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하여 만찬을 열었다. 그때 김정일을 수행했던 북한 철도부 장관이 승무원들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들이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그들을 불러 공연을 하도록 지시했다. 경축연장에 스무 살을 갓 넘긴 네 명의 아름다운 차장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런 반주도 없이 러시아어와 조선어로 노래를 불렀다.
풀리코프스키는 “나는 이 아가씨들이 전문배우들로 노래를 불러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특별히 기차에 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부 장관은 그들의 공연이 마치 즉흥적인 것처럼 준비했지만 실은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풀리코프스키는 북한의 경호원들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다음은 그가 밝히는 김정일 경호원들의 모습이다.
“김정일 주위에는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으나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비롯한 3∼4명의 장관은 줄곧 그와 함께 이동했다. (중략) 김정일은 평범한 주위 사람들에 대해 매우 소탈하게 행동했으며 측근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정일 앞에 설 때마다 머리를 깊숙이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 ‘자세를 바로 하라’는 ‘장군님’의 보일락 말락 하는 신호가 있을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나는 북한 경호원들의 실제 경호 현장을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김정일의 전용칸에서 회담을 하고 있는데 내 공보관이 너무 빨리 다가갔다. 북측 경호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두 팔을 비틀어 올렸다. 그후 그는 더이상 서둘지 않고 상황이 허락할 때만 우리들의 사진을 촬영했다.
북한측 경호원들의 나이는 모두 35세 이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헐거운 정장을 입고 다녔는데, 아마도 옷 속에 숨긴 무기가 잘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측 경호원들은 치수에 꼭 맞는 옷을 입었지만 재킷 속 어디에 총을 숨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 경호원들은 자주 우리측 경호원들을 껴안고 어깨나 등을 가볍게 치거나 손가락으로 배를 찔러 보는 등 장난을 치면서 총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내려 했다. 북한측 경호원들은 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한 경호원이 우연인 것처럼 내 몸에 손을 스치더니 또 다른 경호원이 번갈아 가며 손을 스치곤 했다.”
김정일은 풀리코프스키와 대화 중 한 번은 그에게 ‘러시아에 훌륭한 통역사들이 있느냐’고 물었다. 러시아 외무성 직원들은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고급 전문가가 한 사람도 없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풀리코프스키는 “유감스럽게도 최근에는 러시아 학생들이 평양에 유학할 기회가 없습니다. 전에는 소련 통역사들이 평양에서 5년 정도씩 언어 연수를 했지만 이제는 서울로 갑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김정일은 “북조선과 남조선은 말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과 대화를 하던 중 그의 말을 약 80%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북조선을 다녀간 남측 기자들은 우리 모국어의 올바른 철자법이 북쪽에서만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특히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남북정상회담에서조차 언어의 이질화 때문에 자칫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