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진로배 세계최강전에서 우승한 한국. 왼쪽부터 유창혁, 이창호, 정수현, 서봉수, 조훈현.
97년 열린 제5회 진로배 최종국. 서봉수(오른쪽)가 마샤오춘을 꺾고 9연승 신화를 썼다.
진로배가 있었다. 국가대항단체전과 연승전 방식을 결합한 세계바둑 최강전은 신선한 기획이었다. 진로그룹이 후원을 결정하면서 SBS배는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으로 바로 이어졌다. 5인 단체전에서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항상 고정멤버였으니 한국우승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 명은 매회 바뀌었는데 1회 장수영·2회 정수현·3회 양재호·4회 최규병·5회 김영환이 출전 선수였다. 97년 5회 대회에선 서봉수가 기적적인 9연승까지 거뒀다. 그래서 97년 외환위기로 20년 전 없어진 ‘진로배’란 이름은 서봉수가 성적만 좀 내면 바로 다시 언론에 회자된다. 진로배 하면 서봉수다.
1기 농심배 한국선수단. 왼쪽부터 이창호, 목진석, 조훈현, 유창혁, 김영삼.
농심배가 있다. 진로에서 농심신라면으로 후원사만 바뀐 세계바둑 연승최강전이 새 천년을 열었다. 올해 제21회 농심배 국내선발전이 오는 7월에 열릴 예정이다. 농심배 20년 역사는 ‘영웅’ 이창호가 수놓았다. 이창호는 1회 대회부터 주장을 맡아 우승해결사로 활약했다. 특히 2005년 열린 6회 대회에선 마지막 선수로 나가 뤄시허·장쉬·왕레이·왕밍완·왕시까지 중·일 강자 다섯 명을 연파했다. 상하이대첩이라 불린다. 이창호는 2000년 3월 27일 일본대표 조선진에게 승리한 후 2005년 2월 26일 중국대표 왕시(상하이대첩)까지 농심배 본선에서만 무적 14연승을 올렸다. 9회부터 13회까진 와일드카드를 받아 출전했었다. 2012년부터 농심배 본선에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지만, 아직도 농심배 하면 이창호다.
제9회 황룡사배에서 한국 우승을 견인한 최정(왼쪽)과 오유진.
정관장배가 있었다. 2002년 개인전으로 시작했지만, 2004년부터 연승최강전 ‘여자프로’ 버전으로 변모했다. 2011년 대회까지 9회가 치러졌다. 흥행이 농심배 못지않았다. 한·중·일 여전사들은 이를 악물고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정관장배에서 ‘연승 여신’으로 떠오른 이는 이민진과 박지은이었다. 마지막 대회에서 7연승을 거두고 항저우를 평정한 문도원도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했다. 정관장배가 사라지자 대회 틀은 그대로 중국으로 갔다. 바로 황룡사배다. 중국기원과 장옌구 인민정부 주최다. 황룡사배는 2011년 개막해 지금까지 중국이 5번, 한국이 4번 우승컵을 차지했다. 올해 6월 끝난 제9회 황룡사배에선 마지막에 오유진이 4연승 ‘토스’, 최정이 2연승 ‘강스파이크’를 날려 일본과 중국을 제치고 초여름 시원한 우승을 선사했다.
서봉수는 2016년 지지옥션배에서도 9연승을 하며 대회 연승 신기록을 경신했다.
지지옥션배가 있다. 흥행을 보증받은 연승대항전에 남녀 성대결까지 더한 멋진 기획이었다. 지지옥션배는 조훈현, 서봉수 등 추억에 기사를 다시 소환하는 마당이었다. 또한 여자프로에겐 새로운 승부욕을 자극하는 도전무대였다. 2007년 여름에 개막했다. 대회명은 ‘여류 대 시니어’에서 나중엔 ‘신사 대 숙녀’로 업그레이드했다. 12년 동안 남녀 프로기사가 시소게임을 벌여 최종 전적은 숙녀팀이 7승, 신사팀이 5승이다. 숙녀 팀이 1·4·5·8·9·11기, 신사팀은 2·3·5·7·10기 우승했다. 대회 간판스타 조훈현은 국회 등원으로 2016년부터 빠졌지만, 바로 이어 이창호가 신사팀 마스코트가 되었다. 서봉수는 1기부터 나온 터줏대감이다. 10기에선 쟁쟁한 진로배 9연승을 재현하며 지지옥션배 최다연승기록을 경신했다. 작년 벌어진 12기에선 마지막 주장으로 나와 분투했다.
잘 기획한 멋진 대회는 팬들이 바로 반응한다. 바둑대회 연승전 끝판왕이 지지옥션배였다. 그런데 최근 지지옥션배 개최 여부에 대해 이런저런 아쉬운 말이 들린다. 지난 2011년 시상식에서 “100억 원을 줘도 팔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명주 회장이 아끼던 대회다. 한 바둑계 인사는 “실제로 강 회장은 바둑계에 100억 원 이상 기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응창기배처럼 기금재단을 만들어 자식 대까지 대회를 이어가겠다는 계획도 들었었다”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매년 여름 이 대회는 아마추어 남녀·여자·시니어기사를 하나로 묶어 ‘어벤져스’로 만들었다. 바둑 올스타전이었다. 연승 영웅열전이었다. 서봉수 9연승도 다시 지지옥션배에서 터졌다. 그런데 진로배나 정관장배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한다. 내년 기사에서 지지옥션배가 ‘있었다’라고 쓰긴 싫은 마음이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