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전 회장은 ‘흙과 쇠’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점쟁이의 말을 신뢰했다. 1923년 8월 1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1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970년대 초반까지 세무공무원으로 재직했다. 정 전 회장은 역술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이름 태준에서 태수로 이름을 바꾼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점쟁이가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면 대한민국에서 첫째, 둘째 손가락에 꼽힌다는 말을 듣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연합뉴스
한보선물, 한보관광, 상아제약, 세양선박, 유원건설 등을 설립 또는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웠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가 났다. 이것이 1997년 외환위기를 야기한 한보 사태다. 한보 사태는 외환위기의 요인으로 꼽히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경영, 그리고 문어발식 확장의 부작용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특히 노태우 정권의 비호 아래 종합재벌 전환을 시도했던 한보그룹이 부도가 나자 그룹 내 계열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인수되었다. 정 전 회장이 1996년 구속되자 셋째 아들 정보근 회장으로의 2세 경영체제로 승계됐다. 기업의 주체였던 한보건설은 2000년 미국 울트라콘이 인수했으며 현재는 호반건설 울트라건설이 주인이다. 상아제약은 녹십자가 인수하고 당진제철소 등 한보철강은 현대제철이, 한보상호신용금고(구 삼화신용금고)는 한화저축은행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한보 부도사태의 원인은 자금난을 초래한 당진제철소 건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점쟁이가 쇠를 만져야 큰돈을 번다는 조언을 정 전 회장이 믿고 당진제철소 사업에 주력했다는 풍문이 재계에 떠돌았다. 역술을 믿다가 부도가 난 꼴이지만 일부에선 그 쇠가 동전을 뜻한 것을 정 전 회장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설도 나돌았다.
정 전 회장은 부도 이후에도 재기를 다짐했다. 해외 도피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넷째 아들 정 씨와 함께 키르기스스탄에서 금광사업 등 기타광물 사업에 나섰던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또 에콰도르에서 도피생활 중 중국식 이름으로 신분을 감추고 제2 도시인 과야킬 부촌에 살며 유전 관련 사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회장과 정 씨는 해외도피 중에 이른바 자원외교(?) 사업을 활발히 한 셈이지만 국가적인 위상이 아닌 점쟁이가 말한 흙과 쇠 등을 만져야 한다는 신념을 떨치지 못한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인지 90대가 된 정 전 회장의 이름은 최근에도 고액 상습체납자 명단이 공개될 때마다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검찰이 정 전 회장과 정 씨의 도피 동선을 추적하는 이유는 정 전 회장의 해외 은닉 재산을 찾기 위해서다. 정 전 회장의 체납 세금은 2225억 원대로 셋째 아들 정보근 씨의 체납액 639억 원과 넷째 아들 정 씨의 체납액 253억 원을 합하면 정 전 회장 일가의 체납액이 3000억 원을 훨씬 웃돈다.
한보철강의 당진 제철소 통진식 모습. 가운데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연합뉴스
정 전 회장이 숨졌다면, 정 전 회장이 자식들에게 상속한 재산이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물려받은 재산이 있다면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무 공무원 출신인 데다 위장 신분으로 해외도피를 일삼던 정 전 회장이 실명으로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정 전 회장이 설사 살아있다 하더라도 정 전 회장 명의의 재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회수가 불가능하다. 검찰이 정 전 회장 일가의 해외 도피 재산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찰은 정 씨가 해외 도피 전에 스위스로 빼돌린 회사 돈 322억 원의 행방을 쫓다보면 정 전 회장 일가의 해외 은닉 재산 단서가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소 7000억 원대로 알려진 한보그룹 비자금을 정 회장 일가가 어디에 썼는지도 조사 대상이다. 정 씨가 2년 전 지인에게 “비자금은 아버지와 형 옥바라지와 한보철강 인수에 다 썼다”고 말하는 모습이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검찰은 정 씨 등에 대한 재판을 재개하고 추가 수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무엇보다 정 전 회장의 은닉재산을 찾아내도록 외교 공조를 강화할 방침이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