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아들 신병을 확보한 가운데 사정당국 수사 방향은 이들의 체납액 환수에 방점이 찍혀있는 듯하다. 김현준 신임 국세청장 후보자도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세금 체납액 환수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반면 이를 바라보는 법조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김현준 국세청장 후보자가 2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모습. 박은숙 기자
하지만 이는 세금 면탈범들에 대한 사정당국의 원칙론적 입장일 뿐, 실제 정 전 회장의 체납액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실제 정 전 회장이 사망한 게 맞다면, 형사처벌로 받은 벌금 등 형 집행은 정 전 회장 사망과 함께 다 불가능해지고, 세금 체납의 경우 역시 상속인(아들)들이 상속을 거부할 경우 정부가 받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법원은 당시 정태수 전 회장 등이 재판에 불참석하자 궐석 재판으로 2009년 정 전 회장에게 3년 6개월의 징역형과 벌금 등을 선고한 바 있다.
하지만 재산이 체납액보다 크지 않을 경우, 상속을 포기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에 정 전 회장 체납액 2225억 원 역시 상속 포기와 함께 ‘받을 수 없는 돈’이 될 것이라는 평이다. 결국 아들 정한근 씨 등 자녀들의 의사 판단에 달렸다는 얘기다.
그는 “통상 유가족들이 남긴 재산과 남긴 세금 등 채무액을 따져, 재산이 더 많을 경우에만 상속을 하는데 이미 아들도 300억 원에 달하는 체납액이 있지 않냐. 도피 중에 정 전 회장이 재산을 얼마나 불렸을지는 모르지만 체납액보다 재산이 크지 않다면 상속 포기를 하거나, 한정 상속을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정 전 회장의 체납액을 정부가 회수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단언했다.
그러다보니 검찰은 정 전 회장이 실제 사망했는지를 확인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21년 동안 해외 도피 끝에 파나마에서 검거돼 국내로 송환된 전 한보그룹 부회장 정한근 씨의 범인 도피 과정을 수사해 면탈범과 도피 협조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이다.
정 씨는 아버지 정 전 회장이 1년 전쯤 사망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실제 검찰이 입수한 정 전 회장의 사망 및 장례 관련 자료들에서도 정 전 회장이 에콰도르에서 2018년 12월 1일 사망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검찰은 정 씨의 진술만으로 정 전 회장이 사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자금 322억 원을 횡령해 국외에 은닉하고, 253억 원의 국세를 체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정 씨가 처벌을 최소화하고자 거짓으로 정 전 회장 사망을 얘기했을 수 있기 때문.
검찰 관계자는 “과거 유병언 사건도 그렇고, 확실하게 사망을 확인하지 않을 경우 생존설 등 불필요한 의혹이 생산될 수 있다”며 “정 전 회장 사망 관련 진위 파악에 매달리고 있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현재 검찰은 정 전 회장의 일관된 진술과 증거 자료 등을 토대로 사망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에콰도르·키르기스스탄 당국과 공조, 사망증명서 등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방침이다. 이들 부자는 12년가량 키르기스스탄 등지를 거쳐 2년 전부터 에콰도르 과야킬에 정착한 만큼, 정 씨의 진술의 사실 여부도 판단한다는 계획이다.
한보그룹 정태수 전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해외도피 21년 만에 송환돼 서울중앙지검에 압송되고 있다. 박은숙 기자
부실기업에 대한 특혜 대출과 정경 유착 등 한국 경제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낸 한보사태의 장본인 정태수 전 회장이 살아있다면 올해 나이는 96세. 법조계가 아들 정 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대목이다.
또 다른 법원 관계자는 “정 전 회장 나이 등을 감안할 때, 사망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냐”며 “별안간 시체로 발견된 유병언 때와는 다르게 큰 논란 없이 사망 및 상속 포기 등으로 사건은 마무리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검찰은 정 전 회장 부자가 해외에서 도피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지인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부장 예세민)는 26일 정 씨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캐나다 시민권자인 유 아무개 씨(55)를 범인도피 혐의 피의자로 소환해 조사했다.
검찰은 정 전 회장 소재를 추적하던 중 정 씨가 한국에 있던 유 씨 이름으로 2007년과 2008년 캐나다와 미국 영주권을 얻은 뒤, 2011년과 2012년 미국과 캐나다의 시민권을 취득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유 씨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정 씨를 돕기 시작했는지 등을 집중 조사했다.
또 검찰은 정 전 회장의 측근이었던 한보그룹 전직 임원들을 불러 이들 부자의 해외 도주 정황과 국내 연락책의 사실 여부 등을 캐물을 계획이다. 검찰 관계자는 “한보그룹 출신 관계자들의 소환도 고려 중”이라며 “이들의 도주를 도왔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전방위로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