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 유럽에서 열린 사상 첫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경기였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6월 30일과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역사적인 야구 경기가 열렸다. 주인공은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이자 ‘숙적’인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두 팀은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경기를 치른 주인공이 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국제 규격 야구장이 없는 ‘야구 불모지’ 런던에서 야구 경기를 치르기 위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홈구장(런던올림픽스타디움)을 야구장으로 잠시 바꿨다. 미국에서 흙을 공수해 와 축구장을 야구장으로 개조하는 데에만 23일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이렇게 공들여 준비한 첫 대결 상대로 양키스와 보스턴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한 두 라이벌의 경기를 런던의 열정적인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양키스와 보스턴은 어떻게 ‘숙적’이 됐나
‘라이벌’은 모든 프로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같은 강 주변 거주자’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거치면서 ‘하나의 목적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같은 자리를 놓고 겨뤄야 하는 라이벌을 만나기 마련이다. 라이벌의 환희는 곧 나의 좌절로 직결되기에 “인생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라이벌의 희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물론 성적과 상황이 대충 비슷하다고 해서 쉽게 라이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주목할 만한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지려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와 스토리가 필요하다.
양키스와 보스턴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두 팀은 30개 구단이 소속된 메이저리그의 수많은 라이벌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숙적으로 꼽힌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 함께 몸담은 탓에 서로를 넘어야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숙명도 공유하고 있다. 같은 지구 소속이라 매년 여러 차례 맞대결을 펼치는 데도 두 팀의 경기는 늘 초미의 관심을 모은다. 맞대결 경기 티켓은 다른 경기 입장권보다 비싸게 책정된다.
무려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두 팀의 라이벌 구도는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명승부와 명장면을 남겼다. 보스턴은 초창기 메이저리그의 최강팀이었다. 1915년에는 베이브 루스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팀에 합류해 더 강해졌다. 하지만 돈이 급했던 보스턴 구단주가 팀 최고의 스타 루스를 양키스로 보내 버린 1920년을 기점으로 양 팀의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루스는 1923년 양키스타디움 개장 경기를 찾은 7만여 관중 앞에서 친정팀 보스턴을 상대로 구장 첫 홈런을 쳤다. 1932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선 타석에서 배트를 들어 먼 외야 관중석을 가리킨 뒤 바로 그 방향으로 홈런을 날리는 ‘예고 홈런’의 위용을 뽐냈다. 루스의 이적과 활약 속에 사이가 갈라진 두 팀은 이후에도 두 팀은 엎치락뒤치락 전세 역전을 반복하며 끈질긴 혈전을 이어갔다.
두 팀 역사에 가장 치열하고 상징적인 명승부는 2003년과 2004년 월드시리즈 진출권이 걸린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나왔다. 2003년의 승자는 양키스였다. 7전 4선승제 승부에서 3승 3패로 맞선 가운데 7차전이 열렸고, 양키스가 연장 11회 애런 분의 끝내기 홈런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궜다. 그 경기에서 투수교체 판단을 잘못한 당시 보스턴 감독은 팀을 리그 챔피언십시리즈까지 이끌고도 경질됐다.
1년 후 다시 만난 두 팀은 다시 한 번 7차전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양키스가 먼저 3승을 따냈지만, 보스턴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소방수였던 양키스 마리아노 리베라를 이틀 연속 9회에 무너트렸고, 데이비드 오티스가 4차전 연장 12회말 끝내기 홈런과 5차전 연장 14회말 끝내기 안타를 각각 터트렸다. 6차전에서는 그 유명한 커트 실링의 ‘피 묻은 레드삭스’ 투혼이 이어졌다. 결국 보스턴은 7차전에서 10-3으로 대승을 거두고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완성했다. 이어 비로소 ‘밤비노(베이브 루스의 별명)의 저주’를 풀고 86년 만에 우승했다.
#두산과 LG, 뿌리 깊은 역사적 라이벌
두산과 LG의 숙적 관계는 ‘서울’이라는 커다란 시장을 양분하기 시작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한국야구위원회는 서울,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부산을 중심으로 한 6개 구단 체제를 구상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서울은 프로야구 출범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MBC(LG의 전신)가 선점한 상태였다. 반면 대전을 연고로 야구단을 창단할 기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때 서울 팀 2순위 후보였던 두산이 OB라는 이름으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정부와 KBO는 ‘3년 후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해주고, 서울의 선수 자원을 MBC와 배분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두산에 대전을 맡겼다. OB가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프로 첫 3년을 보낸 이유다.
‘잠실 라이벌’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연합뉴스
약속대로 OB는 1985년 서울로 올라 왔다. 첫 1년은 잠실이 아닌 동대문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던 터라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다. ‘강북은 OB, 강남은 MBC’라는 이분법도 생겼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6년 OB가 잠실로 들어오면서 두 팀의 동거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일을 놓고 LG 팬들은 “LG의 집에 두산이 셋방살이를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두산 팬들은 “방송사 텃세에 밀려 빼앗겼던 안방을 베어스가 다시 찾았다”고 맞섰다.
이후 두 팀의 신경전은 서울 지역 신인 1차지명 우선권을 놓고 불이 붙었다. 1992년 서울권 초고교급 투수 삼총사인 임선동-조성민-손경수를 둘러싼 눈치작전은 여전히 스카우트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대학과 고교에서 즉시 전력감 거물 유망주가 한창 쏟아지던 시기라 신인 지명이 더 중요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번번이 LG의 손을 들어줬다.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1990년대 LG의 전성기와 두산의 침체기는 주사위가 갈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이후 양 팀의 희비는 1998년을 기점으로 또 한 번 크게 엇갈렸다. 이전까지는 LG의 전성시대였다. LG는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과 ‘신바람 야구’ 신드롬을 포함해 인기와 성적 모두 두산과 비교할 수 없이 승승장구했다. 맞대결 성적도 그랬다. 하지만 그 후 LG가 급격히 하락세를 타고 암흑기에 접어드는 동안, 두산은 밥 먹듯 가을야구 티켓을 따내며 강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OB에서 두산이 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1시즌 동안 LG 상대 전적 127승 3무 73패로 복수혈전을 펼쳤다. 자존심이 상한 LG는 급기야 2005년 5월 두산과의 주말 3연전을 앞두고 “두산을 이길 때까지 ‘두산전 패전 경기 티켓’을 갖고 있는 관중을 무료로 입장시킨다”는 이벤트를 내걸기도 했다. 격렬한 벤치 클리어링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자존심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잠실구장 이동 경로를 놓고도 한때 갈등했다. LG와 두산의 선수단 라커룸이 각각 3루와 1루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두산이 홈팀일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LG가 홈팀이라 1루 쪽 더그아웃을 쓰는 날이면 양 팀 선수들이 경기 후 서로의 라커룸으로 돌아가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좁은 복도에서 선수들이 종종 부딪히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경전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결국 양 팀 고참 선수들이 “그날 이긴 팀은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라커룸으로 가고, 진 팀은 복도 뒤로 돌아가자”는 ‘솔로몬의 지혜’로 합의를 봤다.
#엘롯라시코, 엘넥라시코, 낙동강 더비, W매치 뜻은?
두산과 LG가 전부는 아니다. 과거 치열한 영호남 라이벌전을 펼친 삼성과 KIA, 2000년대 후반 김성근 감독이 이끌던 SK와 김경문 감독이 지휘하던 두산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혈투 상대였다. 또 라이벌전의 스토리를 결정하는 데는 성적 이외의 다른 요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LG는 롯데, 넥센(현 키움)과 각각 ‘엘롯라시코’와 ‘엘넥라시코’ 구도를 형성하곤 했다.
‘엘롯라시코’는 전국구 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구단이 오랜 기간 함께 최하위에 머물면서 생긴 이름이다.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더비를 일컫는 ‘엘 클라시코’에서 어원을 따왔다. 두 팀의 경기에서 유독 난타전이 벌어지고 치명적인 실책으로 승부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많아지자 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롯데가 19안타 3실책, LG가 18안타 1실책을 기록하면서 13-13 무승부로 끝난 2010년 7월 3일 경기는 이 팬들 사이에 ‘703 대첩’이라 불릴 정도다.
이후 이 별명은 LG와 넥센이 만날 때 다시 응용돼 사용됐다. 두 팀도 한때 만나기만 하면 연장을 불사하는 치열한 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1일 맞대결에서는 16안타 10볼넷을 기록한 넥센이 연장 11회 승부 끝에 18안타 5볼넷을 기록한 LG를 10-9로 꺾었다. 또 2012년 4월 26일엔 넥센이 11안타 3실책 6볼넷, LG가 6안타 1실책 8볼넷을 각각 기록하는 혼란이 펼쳐졌다. 이 경기 역시 승자는 넥센. 늘 상위권을 유지하던 넥센과 당시 늘 하위권이었던 LG가 만나 진흙탕 싸움을 벌이곤 했기에 더 눈에 띄었다.
수 년 전에는 ‘낙동강 더비’와 ‘W 매치’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낙동강 더비는 부산을 연고로 하는 롯데와 마산에 터를 잡은 NC의 대결을 의미한다. NC가 창단하기 전까지 마산은 롯데의 제2 연고지였다. NC는 그런 ‘롯데의 땅’에서 새로 출발했고, 롯데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손민한도 영입했다. 롯데의 상대 팀 투수들이 견제구를 던질 때 사직 관중들이 외치는 “마!”에 맞서기 위해 “쫌!”이라는 구호도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경남 지역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흥행에 불이 붙지는 못했다. 성적이 받쳐주지 못해서다. 두 팀의 순위가 비슷하고 포스트시즌 경쟁을 펼쳐야 라이벌전이 재미있는 법. 하지만 롯데는 2016년 NC전에서 1승 15패로 무참히 깨졌다. 롯데가 ‘NC 포비아’를 떨치고 반등에 성공한 2018년에는 NC가 하위권으로 처졌다. 올해는 다시 뒤바뀌어 NC가 상위권, 롯데가 최하위권에 각각 머물고 있다.
‘W 매치’는 나란히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있는 SK(인천)와 KT(수원)의 맞대결 이름이다. 두 팀의 모기업은 업계 1~2위를 다투는 국내 굴지의 통신사다. KT가 막내 구단으로 KBO 리그에 합류하면서 프로야구를 통한 장외 맞대결을 펼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패. 두 팀 다 인기 구단으로 분류되기는 어려운 상황인 데다, 성적 차가 너무 많이 났다. SK는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KT는 창단 이후 줄곧 하위권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올해는 KT가 5강권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분전하고 있지만, SK가 정규시즌 1위를 달리고 있어 아직 벽이 높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역사적 타격전’ 펼친 런던 시리즈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첫 유럽 맞대결 성적은 어땠을까. 결과는 양키스의 2승 무패 ‘완승’이었다. 양키스는 6월 30일(한국시간) 열린 메이저리그 런던 시리즈 첫 경기에서 보스턴에 17-13으로 이겼다. 폭발적인 관심이 집중된 경기. 무려 5만9659명의 관중이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을 찾았고, 해리 왕자 부부도 영국에서 처음 열린 메이저리그 경기를 직접 찾아 관전했다. 스코어가 보여주듯 ‘역사적인’ 타격전이 펼쳐졌다. 양 팀 선발 투수가 1이닝도 채우지 못한 게 그 시작. 양키스 다나카 마사히로가 ⅔이닝 6피안타 6실점, 보스턴 릭 포셀로가 ⅓이닝 5피안타 6실점을 기록하고 차례로 조기 강판했다. 양 팀은 58분간 진행된 1회에만 6점씩을 주고 받으면서 일찌감치 난타전을 예고했는데, 두 팀의 기나긴 맞대결 역사에서도 1회에 6점씩을 뽑은 건 역대 처음이다. 메이저리그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1회에만 두 팀이 6점 이상 뽑은 건 1989년 토론토-오클랜드전 1회의 7-6 이후 30년 만이다. 두 팀 모두 투수를 8명씩 마운드에 올렸고 양키스가 19안타, 보스턴이 18안타를 각각 때려내 총 37안타를 쳤다. 또 양 팀이 주고 받은 30점은 역대 두 팀의 라이벌전에서 나온 최다 득점 2위 기록(종전 최다 31점)이다. 2009년 8월 맞대결에서 양키스가 20-11로 승리해 31점을 합작한 이후 10년 만에 뉴욕이나 보스턴이 아닌 런던에서 그에 버금가는 점수를 뽑았다. 경기 시간도 무려 4시간 42분이 소요됐다. 9이닝 경기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최장 경기 시간 3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2차전은 1차전만큼 점수가 많이 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 타격전 양상으로 진행됐다. 양키스가 2-4로 뒤진 7회에만 무려 9점을 뽑아 12-8로 역전승했다. 보스턴은 7회에만 투수 세 명을 투입했지만, 연이어 집중타를 때려내는 양키스 타자 14명을 막지 못해 결국 무너졌다.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엔 이날도 6만 명에 육박하는 5만9059명의 관중이 입장해 대성황을 이뤘다. 또 이틀간 두 팀이 뽑은 50점은 역대 양키스-보스턴 라이벌전 2경기 최다 점수 기록이었다. 종전 기록인 1933년과 2009년 2연전 기록(46점)을 넘어섰다. 기념비적인 라이벌전에서 기념비적인 기록이 연이어 쏟아진 셈이다. 내년 시즌에는 양키스와 보스턴이 아닌, 세인트루이스와 시카고 컵스가 런던에서 맞붙게 된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