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여는 1914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39년 일본 오사카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1936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는 등 동양화단에서 뛰어난 화가로 각광을 받았다. 일본과 조선,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면서도 우리나라 국토와 현실에 뿌리를 둔 한국화를 개척해 나간 화가로 평가 받는다.
정종여는 수많은 실경산수화를 남겼다.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폭에 담아낸 산수화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을 표하지 않는다. 반면 정종여의 역사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미술계에서도 가지각색이다. 그가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른 친일 인사인 동시에 월북작가인 까닭이다.
묻혀있던 정종여의 지리산 그림. 사진=연합뉴스
정종여는 대학생 시절 대표적 친일 미술인인 이상범의 제자가 됐다. 당시 일본과 조선 화단에서는 거장을 필두로 한 화실 경영이 유행이었다. 일종의 도제 시스템으로 이상범과 김은호 등 당대의 유명 화가가 개인 화실에 문하생을 받는 형태였다. 정종여는 ‘청전화숙’으로 불린 이상범의 개인 화실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도 꾸준히 작품을 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한 화가들은 국내파 화가들과 비교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겨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꺼렸다. 그러나 정종여는 이런 것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1936년 ‘추교’를 시작으로 1939년 ‘3월의 눈’, 1940년 ‘석굴암의 아침’으로 연속 특선을 차지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간다.
본격적으로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때는 일제 강점기 말이다.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군 수송선을 그려 출품하는가 하면 1945년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위해 ‘수호관음불상’ 1000장을 그려 강화도 군수에게 헌납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보도 자료로 남아있다. 정종여는 결국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미술인 33인 명단에 오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이후 정종여의 행보다. 1945년 해방 이후 국내는 이데올로기 분열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평론가 이구열에 따르면 해방공간 미술가 조직은 우익과 좌익 그리고 중도 협상 계열로 삼분된다. 이때 정종여는 우익 단체의 전신인 조선미술건설본부의 발족위원으로 참여하였다가 후에는 좌익 성향의 조선조형예술동맹과 조선미술동맹 등에서 간부로 활약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는 정치 갈등이 심화된다. 이 시기 정종여는 좌익 예술인의 사상 전향을 강제하기 위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주 1회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등 사상 전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1950년 6·25 이후 북으로 넘어간다. 그는 북한에서도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 것으로 전해진다. 정종여는 월북 이후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월북미술가 가운데 가장 우대를 받았던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정종여의 월북 동기를 이념이나 정치 사상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찾는다. 6·25 발발 직후 좌익 미술인이 모여 북한 실정에 대해 논의할 당시 자리에 있었던 동료 화가의 증언에 따르면 정종여는 “미술인은 미술만 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자. 작품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전쟁 발발 당시 동료 화가와 인민군 2명이 그를 북으로 데려갔다는 유족의 증언도 남아있다.
문제는 정종여를 대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태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절필시대’전에서 그를 이데올로기 벽에 갇혀 평가 절하된 화가로 재조명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보나 당시 일제에 헌납한 작품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사망까지 화가의 활동을 기입한 소책자에도 친일 관련 활동 내역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 미술관으로서의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 전시기획자는 “정종여의 경우 미술계에서도 아직까지도 쉽게 연구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중립적 태도를 보여줘야 할 국립 미술관이 그 역할을 하지 못 해 아쉽다. 차라리 화가에 대해 숨김 없이 소개하고 평가는 대중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6월 4일 전시장을 찾은 한 30대 남성 관객도 “온라인 검색을 해보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화가라고 나오는데 막상 전시장에는 그런 정보가 없어 아쉬웠다. 갤러리가 아닌 국립 미술관인 만큼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국립 미술관의 역사 인식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 한국근대미술소장품’전에서도 정종여를 포함해 이상범, 노수현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작가의 작품을 선정해 논란이 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정종여, 이상범, 노수현은 일부 시기 친일이 있었지만 광복 이후 정체성 확립에 노력이 있었다. 이런 작가들까지 빼면 전시할 작품이 없다”고 해명했다.
한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5월 30일 개막전에서 “절필시대는 당시 많은 화가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미완의 예술세계를 주목하려는 시도”라고 전시 취지를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