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실에 발붙이다
과거 방송됐던 정치드라마 가운데 ‘제5공화국’은 실존 인물과 정치사를 다뤄 큰 사랑을 받았다. ‘정도전’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외에 ‘대물’ ‘어셈블리’ 등은 이상적인 정치인을 내세우며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기는 데 초점을 맞췄다. 최근 방송되는 일련의 정치 드라마는 이상적인 인물을 내세우되,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덧대 몰입도를 높였다.
tvN ‘60일, 지정생존자’는 유명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의 완성도가 높고 골수팬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내 리메이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호평이 쏟아졌다. 한반도의 상황에 맞게 각색된 내용이 지금의 현실과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를 피한 환경부 장관 박무진(지진희 분)이 60일 임기인 대통령 권한대행 업무를 맡으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원작은 미국 정치 현실에 맞게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의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하지만 ‘60일, 지정생존자’는 분단국가의 상황 및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런 부분을 적절히 메웠다.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가 일어나자 북한이 그 배후로 지목되고, 테러 현장에서 북한이 수출해 온 테러용 폭발물이 불발탄으로 발견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당연히 대북 강경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일본 역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본은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며 항공모함을 대한민국 인근으로 진출시켰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은 데프콘 2호 승인을 종용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는 실제 한반도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벌어졌을 법한 각국의 움직임이다.
JTBC ‘보좌관’의 현실감 역시 이에 못지않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들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보좌관들이다. TV 뉴스를 보면 유명 국회의원들 곁에서 항상 얼굴이 살짝 비치는 인물이지만, 정작 대중이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다. 항상 안테나를 세우며 정치 동향을 살피고,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국회의원이 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있도록 정보를 취합하고 시의적절한 입장문을 작성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특히 치밀하게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보좌관’이 캐치한 지극적인 현실적인 모습으로 손꼽힌다. 극중 보좌관 윤혜원(이엘리야 분)이 국정감사를 준비하며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곤감으로 인해 코피를 쏟는 모습은 실제 보좌관들도 종종 겪는 일이라 한다. 보좌관으로 활동하다가 어느 정도 경력을 쌓으면 실제 선거에 도전하고, 낙선하면 결국 다시 돌아와 보좌관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모습 등도 현실적이다.
한 정치부 기자는 “보좌관들도 결국은 실세 정치인이 되길 꿈꾸는 이들이다. 그들이 ‘모시는’ 국회의원이나 유력 정치인들이 승승장구하면 그들 역시 좋은 지역으로 공천을 받고 비교적 쉬운 길을 걸을 수 있다”며 “‘예비 국회의원’이라 할 수 있는 보좌관들의 모습을 생생히 그린 편”이라고 전했다.
# 이상향을 제시하다
하지만 현실만 다뤄서는 드라마가 성립될 수 없다. 시청자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하기 때문이다. ‘60일, 지정생존자’는 정치에 관심이 없던 카이스트 교수 출신 박무진(지진희 분)을 환경부 장관으로 설정하며 재미를 더한다. 과학자답게 오로지 데이터에 의존해 옳은 말을 내뱉는 그는 미국과의 FTA 협상 과정에서 잘못된 환경영향평가서를 들이밀며 디젤차 수입규제를 완화해줄 것을 요구하는 미국 협상단의 오류를 지적한다. 이런 그에게 대통령은 “디젤차 미국 환경영향평가서, 우리 내일은 승인해주고 맙시다. 못이기는 척 선심 쓰듯이”라며 “국민들의 반대에도 우방과의 신의를 지키겠다는 우리 정부의 노력을 미국은 잊지 않을 겁니다”라고 회유한다. 이에 박무진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고, 그런 박무진의 소신에 시청자들이 호응할 무렵 국회의사당이 폭파하며 대통령을 포함한 유력 정치인들이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박무진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시청자들은 박무진이 행하는 이상 정치에 기대를 걸게 된다.
‘보좌관’ 역시 현실적인 묘사 외에도 실제 정치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몇몇 상황을 포함시키며 극적인 국면을 연출한다. ‘보좌관’ 초반에는 수석보좌관 장태준(이정재 분)이 다른 국회의원과 대거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장태준은 이 국회의원에게 뺨을 맞는다. 하지만 보좌관이 국회의원이 대들거나, 반대로 국회의원이 동료 의원의 보좌관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소신을 가진 보좌관이 주도적으로 일을 이끌며 정의를 실현해가려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보좌관이 국회의원을 앞서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보좌관’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드라마적으로 확대 해석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정치 드라마를 그리며 국회의원이 아닌 보좌관이라는 변두리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