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혁명’을 이끌 ‘돌기 압축형 커피 블록’ 공동개발자 이범호 변리사. 사진=이동섭 기자
[일요신문] 꼭 그런 곳이 있다. 사약 마시는 기분으로 들이켜야 하는 커피를 파는 카페가 대표적이다. 활동 반경에 그런 카페만 있다면, 약속 장소를 잡는 것조차 적지 않는 고역으로 느껴질 정도다.
‘사약 커피’를 완성하는 고약한 탄 맛의 원인은 뭘까. 바로 커피 원두 껍질과 커피 속 세포벽 때문이다. 커피 원두는 껍질과 세포벽, 세포벽 안팎으로 스며 있거나 맺혀 있는 커피 오일로 이뤄져 있다. 껍질과 세포벽은 나무와 같은 섬유질이다.
로스팅 된 껍질과 세포벽은 타버린 장작과 같다. 결국 우리가 흔히 마시는 커피는 커피 오일과 불에 탄 장작 내린 물로 이뤄진 셈이다.
커피 원두를 확대한 사진. 노란 점선이 세포벽이다. 세포벽은 나무와 같이 섬유질로 이뤄져 있다. 로스팅 과정에서 탄 맛을 내는 주요 원인이다. 세포벽에 맺힌 원형 방울이 커피 오일이다.
커피를 내릴 때 커피 오일만 오롯이 뽑아내면, 풍미 가득한 커피가 완성된다. 하지만 껍질과 세포벽 조각까지 섞이면 탄 맛 가득한 커피가 된다. 향이 좋은 커피를 뽑아내려면 커피 오일만 뽑아내고, 껍질과 세포막이 물에 덜 섞여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커피 추출법은 ‘그라인딩 방식’이다.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이다. 그라인딩 방식으로 추출한 커피엔 자연스레 껍질과 세포막의 쓴맛이 뒤섞여 있다. 로스팅한 원두를 그라인딩할 때 원두의 껍질과 세포벽은 함께 으깨어져 갈아지는 까닭이다. 그라인더로 갈린 커피엔 분쇄된 껍질과 세포벽 잔해의 맛까지 그대로 담긴다.
결국 커피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려면, ‘껍질과 세포벽이 내는 쓴맛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껏 세계 어디에서도 그 방법을 고안해 내지 못했다. 가장 대중적인 커피 추출법인 ‘그라인딩 방식’으론 원두 껍질과 세포벽의 쓴맛을 제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커피 업계는 그라인딩 방식의 대안을 찾으려 꾸준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원두를 갈지 않고, 압축하는 방식을 고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평한 압축기로 탄생한 커피 원두에서는 커피 오일이 충분하게 뽑히지 않았다. 맛은 밋밋하고 색은 투명했다. ‘숭늉 커피’였다.
그리고 2018년. ‘커피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커피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기술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발원지는 바로 한국이었다. 혁명이라 칭할 만한 기술의 개발자는 옛 특허심판원장 이범호 변리사(65)와 압축 엔지니어인 정현택 신원MS 대표(57)였다.
두 사람의 기술 개발은 “커피를 압축하는 방식을 좀 더 보완하면 어떨까”라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됐다. ‘연구’가 취미인 이 변리사는 신기술 관련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이 변리사의 아이디어를 기술로 구연한 건 정 대표 몫이었다. 둘은 ‘새로운 커피 추출법 개발’을 향한 항해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성과가 났다. 성과물은 ‘돌기 압축기로 만든 커피 블록’이었다.
왼쪽은 커피 원두를 돌기 압축기로 눌러 만든 커피 블록. 이대로 에스프레소 머신에 넣어 커피를 내리거나 그냥 티백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부어도 풍부하고 진한 커피가 나온다. 오른쪽은 커피 블록을 분해한 모습. 커피 원두 껍질이 그대로 살아있다. 즉, 이 커피 블록으로 커피를 내리면 커피 오일만 거의 온전히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사진=일요신문
이 변리사와 정 대표는 평평한 기존 커피 압축기에 돌기를 더했다. 돌기 압축기는 기존 압축기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기존 압축기는 커피 원두를 그냥 밀기만 하다 보니 껍질과 세포벽 안에 숨은 커피 오일을 충분히 추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변리사와 정 대표가 발명한 ‘돌기 압축기’는 커피 원두를 골고루 여러 방향으로 눌러 껍질과 세포벽에 다양한 ‘크랙’을 만들었다. 크랙은 커피 원두의 갈라짐을 일컫는 말이다. 크랙이 발생할수록 커피의 풍미는 살아난다. ‘돌기 압축 방식’으로 원두 껍질과 세포벽 사이에 생긴 크랙에선 커피 오일이 다량으로 추출됐다.
일본에서 개발한 원두 압축기의 산물이 ‘숭늉 커피’였다면, 한국이 개발한 돌기 압축기는 진하고 풍부한 ‘커피 본연의 맛’을 훌륭하게 구현해 냈다. 커피의 과일맛, 단맛, 쓴맛, 떫은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된 것이다.
이 변리사와 정 대표는 공동명의로 신기술의 특허를 신청했다. 2018년 12월 28일 국내 특허가 등록이 끝났다. 국제 특허도 출원된 상태다. 국제 특허는 예비심사 결과 ‘등록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특허는 출원-등록 순으로 진행된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국내 식·음료 대기업과 유럽 소재 기업이 먼저 줄을 섰다. 이 변리사와 정 대표는 조만간 커피 블록을 일일 2만 개 생산하는 설비를 갖춰 초도 샘플 물량을 공급하고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세계 커피 문화를 선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이범호 변리사. 사진=이동섭 기자
이범호 변리사는 “우리나라 커피 산업은 ‘세계 커피 3대장’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앞으론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커피가 세계 커피 문화를 선도했으면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이어 “나와 정현택 대표의 노력이 한국을 커피의 메카로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욱 보람찰 것”이라며 “많은 사람이 커피의 온전한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