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년간 경찰야구단을 이끌어온 유승안 감독. 연합뉴스
[일요신문] ‘KBO 스타의 산실’이 창단 15년 만에 문을 닫는다. 대한민국 경찰청 산하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야구단(경찰야구단) 얘기다. 2005년 창단한 경찰야구단은 KBO 퓨처스리그 경기력 향상을 앞장서 이끈 것은 물론,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의무로 인한 ‘경력 단절’ 문제를 최소화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단체였다. 경찰청 산하 축구단이 지자체와 스폰서 기업 후원으로 운영되는 것과 달리, 야구단은 KBO로부터 운영비를 지원 받아 명맥을 유지해 온 이유다.
하지만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일부 선수의 병역 특례가 논란으로 번지자 경찰청과 국방부는 경찰야구단 신규 선수 선발을 중단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수많은 야구인과 KBO 관계자들이 “재고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결국 경찰야구단은 오는 8월 12일 11기 선수들의 전역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7월 10일 예정됐던 한화 2군과의 팀 최종전이 폭우로 취소돼 자체 행사로 마지막을 장식해야 하는 아쉬움도 겪었다.
#경찰야구단의 출범과 성장
경찰야구단은 2005년 9월 12일 KBO와 경찰청이 야구단 창단 양해각서에 사인하면서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창단 이유는 분명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군 문제 해결을 위해 국군체육부대(상무) 외에 또 다른 야구단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1990년대 프로야구 선수들의 군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줬던 방위병 제도가 폐지된 뒤, 불법적인 방법으로 군 복무를 면제 받으려던 선수들이 2004년 대대적인 병역비리 사건에 휩싸이면서 리그가 초토화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적발된 선수 대부분이 “현역 복무로 인한 2년 공백이 프로 선수 인생에 치명상을 입힐 것 같아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KBO는 근본적인 원인 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고, 그 해결책이 경찰야구단 창설이었다.
첫 선수 선발은 그해 11월 24일에 진행됐다. 처음에는 2년에 한 번씩 선수를 뽑아 새로운 멤버를 구성하는 형태였지만, 2010년부터는 경기 출전 인원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1년마다 새 선수를 충원하기 시작했다. 초대 감독은 김용철 전 롯데 감독 대행. 2008년 6월까지 팀을 지휘하다 개인 사정으로 사임했고, 정현발 코치가 지휘봉을 이어 받아 그해 마지막까지 팀을 이끌었다. 뒤이어 사령탑에 오른 인물이 바로 유승안 현 감독이다. 한화 사령탑 출신인 유 감독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11년간 팀을 이끌면서 ‘경찰야구단 신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경찰야구단의 출발은 썩 대단하지는 않았다. 2006년 2군 북부리그 6개 팀 가운데 5위로 출발했고, 2007년 4위로 반등하는 듯 했지만 2008년엔 최하위까지 떨어졌다. 특히 2006년과 2008년에는 3할대 승률을 벗어나지 못해 체면을 구겼다. 하지만 유 감독이 부임하고 경찰야구단의 위상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한 2009년부터 확 달라졌다. 2010년까지 2년 연속 2위에 오르면서 최초로 2년 연속 5할 승률까지 달성했다. 2011년부터는 그야말로 천하무적. 지난해까지 8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승률 0.560)을 제외하면 모두 6할 대 승률로 시즌을 마치는 기염을 토했다.
#‘번외 팀’으로 맞이한 마지막 시즌
하지만 결국 갑작스럽게 ‘끝’이 왔다. ‘더 이상 경찰야구단 추가 선수 선발은 없다’는 방침이 발표된 뒤 야구계는 “2020년까지 만이라도 해체를 유예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2023년까지 의경제도가 존속하는 만큼 해마다 20%씩 선수를 줄여 뽑거나 2019년에 한꺼번에 30명의 선수를 뽑아 이들이 제대하는 시기에 경찰야구단이 문을 닫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문화·체육 인사들의 병역 특례 조처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이미 상무가 존재하는 만큼 경찰청 소속 야구단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야구대표팀 병역 특례로 인한 논란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정부의 방침도 더 확고해졌다. 끝내 경찰야구단은 2019년 신규 선수 선발을 중단했고, 올해 8월 전역하는 단 20명의 선수로 마지막 시즌을 맞아야 했다.
동시에 퓨처스리그 운영에도 차질이 생겼다. 선수 20명으로는 정상적인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야구단은 마지막 시즌을 일주일에 3경기만 치르는 ‘번외 팀’으로 참가하게 됐다. 경기 수는 총 48경기. 여전히 6개 팀으로 운영되는 남부 리그 팀들과는 3경기씩 총 18경기를 소화하고, 원래 소속됐던 북부 리그 5개 팀(한화, 고양 히어로즈, SK, LG, 두산)과는 6경기씩 30경기를 치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경찰야구단이 벽제 경찰야구장에서 치른 마지막 홈경기는 지난 6월 30일 두산전이었다. 두산을 8-5로 꺾은 경찰야구단 선수들은 경기 후 마운드 근처로 모여 1루와 홈플레이트 사이에 자리한 팬들을 향해 거수경례했다. 2군 번외경기를 찾아준 팬들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자 홈에서 팬들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였다. 또 경기가 비로 취소된 7월 10일 마지막 날에는 서산구장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모두 팬들이 선물한 해바라기 꽃을 들고 조촐한 고별 의식을 치렀다. 선수들은 유 감독은 물론 경찰야구단을 5년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한상재 관리반장을 헹가래치며 진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제 둥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 이들은 그동안 아껴둔 휴가를 사용해 원 소속팀에 합류한 뒤 전역일까지 몸을 만들며 복귀를 준비할 예정이다.
경찰야구단 해체가 그 누구보다 허탈할 유 감독은 “2009년 부임한 뒤 200여 명의 선수들이 거쳐 갔다.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한다”며 “미완성인 선수들이 경찰야구단에서 성장해 KBO 1군 무대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참 뿌듯했다”고 회상했다. 또 “우리 경찰야구단은 한국 야구에 공헌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열심히 노력한 구단으로 기억됐으면 한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경찰야구단 11기 마지막 멤버로 역사에 남게 된 NC 포수 김태군은 “나는 병역 의무를 소화하면서도 야구를 계속했다. 경찰야구단 덕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며 “그런데 내가 얻은 기회를 후배들은 누리지 못한다는 게 참 아쉽다”고 했다. 류대환 KBO 사무총장은 “KBO 리그 경기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준 경찰야구단이 이렇게 해체 과정을 밟는 게 정말 아쉽다”며 “KBO 차원에서 보완책 등을 준비하고자 한다”고 했다.
경찰야구단이 낳은 대표 스타 양의지. 2기 멤버였던 양의지는 전역 직후 KBO 신인왕에 올랐다. 연합뉴스
경찰야구단은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품에 안았던 요람이었다. KIA 최형우는 경찰야구단에서 프로 커리어의 반등을 이룬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최형우의 성공 이후 경찰야구단을 바라보는 프로 선수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형우는 2006년 삼성에서 방출된 뒤 상무 야구단 입단 테스트에서도 탈락해 그대로 선수 생활을 접을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한화 최진행, 삼성 손주인 등과 함께 경찰야구단 창단 멤버로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입단 2년차인 2007년 2군 북부리그 타격 7관왕에 올랐다. 이후 성공 신화는 잘 알려진 대로다. 전역 후 삼성에 재입단해 기회를 얻은 그는 2008년 KBO 리그 신인왕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삼성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했고, 2017년 KIA로 이적하면서 4년 총액 100억 원을 받아 프리에이전트(FA)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최형우는 “그때는 경찰야구단 선수들 절반 정도가 소속팀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그 선수들이 2년 동안 엄청 노력했다”며 “나도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노력했다. 경찰야구단이 없었으면 나는 야구를 못했을 것”이라고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2008년 입단한 2기 멤버 가운데선 NC 포수 양의지가 단연 으뜸이다. 당시 두산 2군 포수였던 양의지는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군복무를 선택한 뒤 경찰야구단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2년간 포수로서 기틀을 닦은 뒤 전역 직후인 2010년 역시 KBO 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이뿐 아니다. 두산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국가대표 공수겸장 포수로 성장했고, 결국 지난 시즌이 끝난 뒤 4년 총액 125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받고 NC로 이적했다.
당시 현대 소속이던 투수 손승락(롯데) 역시 양의지와 같은 시기에 경찰야구단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특급 마무리 투수로 성장할 기틀을 닦았다. NC의 현 마무리 투수 원종현과 NC 조영훈 코치, KIA와 삼성에서 뛴 투수 신용운도 이때 경찰야구단에서 함께 뛴 멤버다.
삼성 우규민과 한화 최재훈, 두산 허경민, NC 임창민은 2010년부터 2년간 경찰야구단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입단 전 LG 뒷문을 불안하게 지켰던 우규민은 2년째인 2011년 퓨처스리그에서 15승 무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34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면서 투수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LG에서 선발 투수로 제 기량을 발휘한 뒤 삼성으로 FA 이적했다. 두산에서 양의지의 뒤를 이어 입단한 최재훈 역시 전역 후 ‘10개 구단 최고의 백업 포수’로 이름을 날리다 한화로 이적해 주전 포수로 성장했다. 허경민 역시 전역 후 두산 철벽 내야의 키플레이어로 발돋움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경찰야구단의 승승장구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할-20홈런-20도루가 가능한 민병헌(롯데)과 박건우(두산)는 전역 후 더 날개를 펼치면서 리그 정상급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 경찰 복무를 마친 뒤 처음으로 타율 3할을 넘겼던 민병헌은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야구를 했다. 내가 달라진 계기”라고 떠올렸다. 입대 당시 롯데 소속이던 투수 장원준(두산)도 경찰야구단에서 국가대표급 기량을 뽐낸 뒤 꾸준히 리그 최정상급 왼손 투수 명성을 유지했다. 키움 신재영은 2014년부터 2년간 군 복무를 마친 뒤 전역 첫 해인 2016년 1군에서 15승을 올리면서 경찰야구단이 배출한 역대 신인왕 계보를 잇는 데 성공했다. LG 세대교체의 기틀을 다진 이천웅도 경찰야구단 간판타자로 활약하다 전역 직후부터 주전 외야수 자리를 꿰찬 케이스다.
롯데 전준우는 2016년 경찰야구단에 소속된 선수들 가운데 최연장자라 그해 주장을 맡기도 했다. 유승안 감독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경찰야구단 출신 선수’로 전준우를 꼽으면서 “리더십이 남다르고 부드러움 속에 강한 카리스마가 있더라. 모든 면에서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했을 정도로 내게 믿음을 줬던 선수”라고 극찬했다. 두산 포수 이흥련은 삼성 소속으로 경찰야구단에 합격했지만, 입단을 눈앞에 둔 2016년 11월 27일 FA 이원석의 보상 선수로 두산에 이적하는 이색 기록을 남겼다.
이뿐 아니다. 올 시즌 KIA 주장을 맡고 있는 안치홍과 두산 주전 외야수 정수빈도 군 복무를 경찰야구단에서 해결했다. 이미 국가대표급 주전 선수로 활약하다 입대했던 안치홍은 “그동안 해왔던 야구를 돌아보는 시간이자 성적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해보고 싶은 야구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돌이켰다. 이 외에도 SK 배영섭, 두산 홍상삼 장승현, 키움 장영석 김동준 송우현, LG 임찬규 백창수, NC 윤지웅 장현식, 삼성 박찬도, KIA 유민상 한승택 박준표 김호령, 한화 김회성, 롯데 신본기 한승혁 등 수많은 선수들이 경찰야구단을 거쳐 갔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