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야 표도로바
조야 표도로바는 1930~40년대 러시아(구 소련)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였고 스탈린이 주는 영화상을 두 번이나 받았던,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연기자였다. 하지만 전쟁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차 대전 시기만 해도 냉전 이전이었고, 러시아와 미국은 우방이었다. 모스크바엔 대사관이 있었고, 미 국무부는 나치에 맞설 공동 전선 구축을 위해 그곳에 장교를 파견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잭슨 테이트였다. 그는 항공모함 랜돌프 호를 이끄는 40대 후반의 해군 함장이었다.
조야 표도로바가 잭슨 테이트를 만난 건 대사관 파티였다. 그들은 첫눈에 반했고,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때 KGB의 전신인 NKVD(내무인민위원회)가 그들의 관계를 알아챘고 비밀경찰을 보내 관계를 끝내라고 두 사람에게 경고했다. 전체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자국의 여배우가 전시에 다른 나라 장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었다.
이때였다. NKVD의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이 사실을 약점 잡아 조야 표도로바에게 은밀한 관계를 요구했지만, 표도로바는 거절했다. 베리야는 앙심을 품고 표도로바와 테이트의 관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결국 테이트는 러시아에서 추방당했으며 표도로바는 스파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5년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가게 된다. 1946년 낳은 딸 빅토리아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언니 집으로 보내졌고, 빅토리아는 이모를 엄마로 알고 성장한다.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표도로바와 테이트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날, 즉 유럽 전승 기념일인 1945년 5월 8일을 기념한 날이었다. 이때 두 사람은 아들을 낳으면 빅터, 딸을 낳으면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고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잭슨 테이트
커크 교수는 러시아의 한 소녀에게 함장 출신의 미국인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고, 미국으로 돌아와 잭슨 테이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커크는 드디어 테이트를 만나게 된다. 퇴역 후 플로리다에서 은둔하며 살던 테이트를 찾긴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그는 표도로바가 딸을 낳은 것도, 그리고 수용소에서 8년 동안 고생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커크는 테이트에게 표도로바 모녀의 편지를 전해주었고, 잭슨 테이트는 러시아 정부에 딸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1975년 3월, 어느새 서른 살 가까이 된 빅토리아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온다. 생전 처음 아버지를 만난 빅토리아는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 공군 파일럿인 프레드릭 푸이라는 남자를 만나 6월 7일에 결혼한다. 이렇게 빨리 결혼을 서두른 건, 빅토리아의 비자 기간이 3개월이었기 때문.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빅토리아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고,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다음 해 빅토리아는 아들을 낳았다. 표도로바는 손자를 만나기 위해 러시아 당국에 미국 방문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아 플로리다로 날아간다. 그리고 30여 년 만에 드디어 운명의 연인이었던 잭슨 테이트와 재회한다. 2년 뒤 테이트는 세상을 떠났으니, 조금만 늦었다면, 빅토리아가 가교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1981년, 조야 표도로바는 딸과 손자를 만나고 싶어 러시아 당국에 출국 비자를 신청한다. 하지만 이번엔 거절당했다. 빅토리아가 1979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제독의 딸’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여기서 빅토리아는 자신의 부모가 러시아에서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술했는데, 그 내용을 러시아 당국이 부정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모스크바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조야 표도로바가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자살도 자연사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쏜 총이 표도로바의 눈을 관통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범인은 알 수 없었다. 표도로바가 일을 당하기 전, 그 누구도 아파트로 들어가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는 게 경찰의 발표였다.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고, 표도로바의 죽음은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한때는 표도로바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기사가 유럽이나 미국의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표도로바와 빅토리아 모녀
이후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당국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추측했다.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안티 러시아의 상징적 인물이 된 빅토리아를 만나러 가겠다고 요청한 건 결정적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일단 비자 발급을 거부하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만남을 요구할 경우 영원히 거절할 순 없는 일. 혹시 표도로바가 미국에서 망명 신청이라도 한다면, 냉전 시대의 러시아엔 꽤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영원히 미궁 속에 빠져 버렸고, 빅토리아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다 2012년 66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