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 사진=tvN
7월 14일 아이유, 여진구 주연의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가 임금 체불 논란에 휩싸였다. 피해자 김 아무개 씨 외 1명은 1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호텔 델루나’의 세트팀 ‘휴먼아트’가 2250만 원의 임금을 8개월째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지난해 9월 중순부터 tvN 드라마 ‘남자친구’의 세트 제작에 참여했다. 직전 작품에 대한 임금도 밀려 있던 상태였다. 전체 스태프는 약 100명 정도 됐다. 그 가운데에서 13명이 두 달간 세트를 지었다. 매일 12~15시간씩 40일 이상 일했다. 세트를 다 지은 뒤에는 13명 중 4명만 촬영 현장에 투입됐다. 촬영 현장에서는 40시간을 연속으로 촬영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세트팀의 경우 다른 팀보다 더 높은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홍승범 사무차장은 “다른 분야의 스태프는 A팀, B팀으로 나뉘어서 로테이션을 도는데 세트팀은 혼자서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한다. 체력소모가 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개월치 임금이 밀린 김 씨는 지난 1월 초 일을 그만뒀다. ‘더 일해봤자 못 받는 돈만 늘어날 뿐’이라고 판단해서다. 김 씨와 그의 친구는 그간의 임금을 받고자 지난 3월 고용노동부에 진정신청서를 냈다. 이후 휴먼아트로부터 온 답변은 황당했다.
‘밀린 임금을 언제 줄 것이냐’는 김 씨에 질문에 휴먼아트 관계자가 “넌 내가 한마디 해줄게. 노동청에 신고했을 때 통화했었지. 취소하라고. 그럼 3~4월에 나눠서 주겠다고. 근데 네가 취소는 못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담당자한테 한 말이 있다. 신고 취소를 안하겠다고 하면 최대한 늦게 주겠다고. 전에 못 줬던 건 미안하나 네가 너무 삐딱한거 같으니 삐딱하게 대해줄게. 그러면 되는 거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신고한 것이 괘씸하니 돈을 더 늦게 주겠다는 뜻이었다.
김 씨는 tvN과 CJ E&M의 대처도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는 “지금 방영 중인 ‘호텔 델루나’와 ‘남자친구’의 미술 감독이 같아 세트팀도 휴먼아트가 맡게됐다.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고 임금체불도 상습적으로 하는 업체와 계약을 유지하는 방송사를 이해할 수 없다.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꼴”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CJ E&M 관계자는 “도급 계약의 경우 임금 체불에 관해서는 자사의 책임이 없다. ‘남자친구’ 제작사는 하청업체에 제작비를 모두 지급했다고 한다. 휴먼아트 측에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빠른 시일에 해결하라고 권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국언론노조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실질 사용자인 방송사 CJ E&M에 1차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홍승범 사무차장은 “방송계에서는 실질적 사용자를 제작사·방송사로 본다. 도급계약이라고 하면 업무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현장에 가보면 각 팀의 모든 감독들은 방송사와 제작사의 지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1차적 책임은 편성권을 가지고 있는 방송사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tvN ‘혼술남녀’ 조연출 사망 사건에 대해 CJ 측의 사과를 요구하는 대책위원회. 사진=연합뉴스
#뒷짐만 지고 있는 CJ E&M
제작사·방송사와 하도급 업체 사이의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는 26시간의 장시간 촬영이 문제가 됐고 드라마 ‘화유기’에서는 미술팀 스태프가 현장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한빛노동인권센터와 희망연대노조가 4월 제작사를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한 바 있다. 현재는 관련 조사가 끝나고 처분 결과만 남은 상태다.
숱한 논란에도 CJ E&M이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말한 계약 형태에 있다. 통상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는 각 분야의 감독을 필두로 제작사와 도급계약을 맺는다. 예컨대 1명의 미술감독과 일정 인원의 스태프가 모여 미술팀을 만든 뒤 제작사와 계약을 맺는 형식이다. 이를 턴키계약이라고 한다. 법적으로는 제작사와 감독 1명 사이의 계약으로 인정된다.
턴키계약을 맺으면 제작사는 각 팀의 감독에게 제작비 전체를 지급한다. 그러면 감독이 제작비 가운데 일부를 팀원에게 배분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태프 개인이 부당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거나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팀 내부의 문제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감독 역시 한정된 제작비로 장비와 식비 등을 모두 지불해야 하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입장이다. 반면 먹이사슬 최상에 위치한 방송사는 늘 직접적인 책임에서 배제됐다. 이 때문에 턴키계약은 방송사가 현장에서 발생하는 책임을 현장 감독에게 전가하는 불공정한 계약형태란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와 같은 비판 여론이 커지자 CJ E&M은 지난 9월 새로운 제작가이드를 공개했다. ‘2018년 9월 이후 계약할 드라마부터는 턴키계약이 아닌 스태프 개별 계약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발표 직후부터 현장 스태프 사이에서는 있으나마나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하도급 업체와 사업자와 계약할 때는 지금처럼 턴키 방식이 가능하다’는 예외 조항이 있어서다. 중간 업체가 낀다면 얼마든지 턴키 계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로 5년차인 한 미술팀 스태프는 이에 대해 “개별 계약은 일부 현장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동료 가운데 제작사와 직접 계약을 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스태프는 여전히 턴키 계약을 맺고 있다. 오히려 중간 업체는 더 많이 등장했다. 근로계약서는 당연히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좋은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에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드라마 왕국이라는 tvN의 명성이 현장 스태프의 과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