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 핵심 부품 수출 규제로 시작된 한국과 일본 경제 갈등이 심상치 않다. ‘대화로 풀겠다’던 문재인 정부도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가야 한다”며 태세를 바꿨다. 일부 한국 언론들은 “아베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일부러 한일 갈등 이슈를 활용하는 면이 있다”고 일본의 속내를 진단한다. 정작 일본 분위기는 다르다. “수개월 동안 한국에게 강제 징용판결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이 없어 나온 대책이 수출 규제”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이제 시작인 것 같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적지 않다.
특히 지한파 일본 외교계 관계자들은 “아베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라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올해 초, 문재인 정부를 신뢰했던 지한파들이 발언권을 잃었다는 것. 대화 실무자인 외교부처 라인의 목소리가 아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목소리만 오간다는 얘기다. 두 정부 모두 상대국에게 외교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자국민을 향한 설득과 해명만 나오고 있어 당장 사안이 수습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외교계 중론이다.
2018년 9월 25일 미국 뉴욕 파커 뉴욕 호텔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 = 청와대제공
# 지난해 말 강제징용 판결 뒤 악화일로
사실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는 올해 초부터 계속 나온 얘기였다. 대법원이 지난해 11월 양금덕 할머니 등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5명에게 미쓰비시가 1억~1억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하자, 일본은 즉각 반발했다. 아베 총리는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이번 판결과 관련해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생각한다”며 더 이상의 배상은 없다고 곧바로 선을 그었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도 “한국 정부는 일본 기업과 일본 국민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단단히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일본 기업 피해를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에 한국 정부는 답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잠잠했지만, 물밑에서 일본은 지속적으로 한국에 “법원 판결에 대한 대책을 달라”는 불만을 토로했고 관계는 멀어져 갔다.
그리고 지난 3월 즈음, 외교계에서는 ‘일본이 경제 보복을 준비한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인 방안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때 그리고 5월 열릴 예정이었던 ‘한일경제인회의’가 연기되는 등 조금씩 갈등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도 악화된 분위기를 고려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남관표 신임 주일대사를 내정하고, 지난달 중순에는 한·일 양국의 징용문제 관련 기업이 피해자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는 해법도 제시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대응이었을까, 일본은 거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일본은 경제 보복 카드를 꺼내들었다.
일본이 선택한 경제보복은 반도체 관련 핵심 부품 수출 규제였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고순도 불화수소(에칭 가스), 리지스트, 세 가지였는데, 일본이 세계 시장의 70~90%를 점유하고 있는 필수 소재다. 한국 기업들이 해당 품목을 수입할 때마다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에서 일본 경제보복대책 당청 연석회의가 열리고 있다. 박은숙 기자
# “당장 해결 없다, 일본도 각오한 규제 정책” 일본 속내는?
그렇다면 일본의 속내는 뭘까. 일부 언론은 “아베 신조 총리는 7월 2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애초부터 징용 배상 판결을 한일 정상회담과 연계해 수출 규제 카드를 선택했다”고 진단하지만, 이에 대한 일본 측 대응은 단호하다. ‘오판’이라는 얘기다.
일본 대사관 관계자는 “아직까지 한국에서 이번 조치가 선거용이라고 완전히 오해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일본 외교관 역시 “참의원 선거 끝난 뒤에도 청와대가 이대로라면 오히려 더 강한 조치가 나올 수 있다”며 “다른 것은 몰라도 일단 일본 정부가 예전과 달리 완전히 화난 것은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측은 강제징용 판결로 ‘또 배상’해야 한다는데 불만이 크다는 얘기다. 일본통 외교계 관계자는 “일본은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한일 협정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배상하고 사과하라’는 요청에 지쳐 있는 상태”라며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제대로 된 동의 없이 배상을 일방적으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배상하기로 협의가 됐는데 이제 와서 또 ‘기업이 개별적으로 배상하라’고 하는 것에 ‘더 이상은 받아줄 수 없다’는 판단이 선 상태”라고 진단했다.
한국 측이 지난달 제시한 1+1(한일 기업) 공동 위자료 부담도 ‘늦었다’는 지적이다. 앞선 일본 외교관은 “이번에 한국 정부가 제안한 한일 기업 공동 위자료 부담은 이미 수개월 전 일본 측에서 강제징용 판결 뒤 한국 측에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제안했던 내용”이라며 “우리가 한 제안을 이제 와서 한국이 먼저 하듯 하는데 일본 정부가 쉽게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오히려 불을 붙였다는 얘기다.
실제 일본은 한일 이슈에서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까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할 정도로 여론이 기울었다는 게 일본 외교관들이 전하는 일본 내부 분위기다.
실제 8일 일본 TBS 방송은 계열사인 JNN 여론조사가 지난 6~7일 19세 이상 성인 23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본 국민 60% 정도는 이번 수출 규제에 동의했다. TBS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한국에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재료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 것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타당하다”고 답한 사람은 58%로,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24%)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앞선 일본 대사관 관계자도 “한국이 지난해 나온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일본 기업과 국민들의 피해가 없게끔 해줄 것인지, 또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일본 기업과 일본 국민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과 이를 지켜줄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을 해야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다”며 “그 전까지 일본은 추가로 규제를 내놓고 한국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중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중소상인, 자영업자들이 ‘무역 보복 규탄, 일본산 제품 판매 중단 선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 “불매 운동 어쩔 수 없지만” 지나친 억측, 오해 확산 우려
한국에서는 일본 브랜드 제품 구매 금지, 일본 여행 자제 등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유니클로는 본사 재무책임자(CFO)인 오카자키 다케시가 지난 1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결산 설명회에서 한국의 불매운동에 대해 “(불매운동의 영향이) 장기간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실적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가 사과를 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도 렉서스와 소니, 유니클로 등 한국 수출 규모가 큰 기업들에 대한 ‘매출 감소’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교계는 불매 운동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오해가 쌓여 갈등이 더 종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점은 우려한다. 특히 정치계가 ‘갈등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 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부 간 첫 실무회의에서는 ‘의도적 홀대가 연출됐다’는 갈등론도 외교계는 경계한다. 음료수도 주지 않고, 간이 책상을 가져다 놓고 하는 등 홀대했다는 게 일부 언론의 해석이었는데 이에 전직 외교공무원 출신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교수는 “외교 의전의 실제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뭔가 비판하겠다는 생각이 앞서니 나온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앞선 일본 대사관 관계자 역시 “일본 정부청사에 가보면 그런 회의실밖에 없는 것도 쉽게 알 수 있고, 일본 사람은 원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악수하는 습관도 없기 때문에 실무자가 만날 때 악수 안 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간 갈등이, 일반 국민 간 갈등으로 퍼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앞선 일본 외교계 관계자는 “만에 하나 본격적인 불매 운동으로 퍼질 경우 일본 국민들이 더 한국을 안 믿게 된다”며 “반대로 일본에서 불매운동 생기면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입게 되고 그럴 경우 갈등은 정말 정부 대 정부가 아닌 국민 대 국민이 돼 종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일본 정보에 밝은 법조인은 “지금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태도를 볼 때 쉽게 갈등이 마무리될 수 없는 게 자명하다”며 “일부 정치인들이 다소 선동적인 얘기를 꺼내는데 정말 갈등을 풀 생각이 있다면 일본의 혼네(본심)가 뭔지 파악해서 일본에게 받아야 할 진짜 사과와 우리가 일본에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뭔지 국민들에게 동의를 얻어가는 방식으로, 진짜 대화를 하려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