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올스타전은 승부라기보다 ‘축제’에 가깝다. 물론 그 축제의 초청장은 프로야구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뽐낸 선수들만 얻을 수 있다. 각 구단 팬들은 좋아하는 선수를 그 축제에 참가시키기 위해 기꺼이 치열한 투표 전쟁에 참가한다. 또 KBO 리그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적 스타들은 이 축제의 장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올스타’라는 단어가 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중요한 훈장이자 목표로 여겨지는 이유다.
올스타전은 KBO 10구단 스타들과 마스코트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다. 사진은 지난 2018 KBO 올스타전.연합뉴스
# 올스타전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올스타전은 야구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1933년 미국 시카고시 당국이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World‘s Fair)를 유치한 게 발단이었다. 에드 켈리 당시 시카고 시장은 “이 시기에 맞춰 큰 스포츠 이벤트를 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시카고 트리뷴지와 상의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시카고 트리뷴 체육부장인 아치 워드가 ’올스타전‘이라는 이벤트의 얼개를 짰다.
결국 그해 7월 6일 시카고에서 사상 첫 올스타전이 열렸다. 시카고 컵스 홈구장 리글리 필드와 시카고 화이트삭스 홈구장 코미스키 파크를 놓고 동전 던지기를 해 화이트삭스가 이겼다. 이 이벤트를 고안한 워드는 “적자가 나면 내 봉급에서 제하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결과는 관중 4만7595명이 들어찬 폭풍 흥행.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가 아메리칸리그의 첫 승리를 이끌었다.
이보다 더 훈훈한 ‘설’도 하나 있다. 한 어린이 야구팬이 시카고 트리뷴에 “최고 타자 베이브 루스와 최고 투수 칼 허벨(뉴욕 자이언츠)의 맞대결을 꼭 보고 싶다”는 글을 보내면서 올스타전의 아이디어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당시 아메리칸리그 선수와 내셔널리그 선수의 맞대결을 볼 수 있는 무대는 월드시리즈가 유일했다. 양대 리그 스타플레이어들이 서로 맞붙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이 무척 많았다. 그 꿈이 올스타전을 통해 이뤄졌다는 의미다.
이후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도 훗날 메이저리그와 같은 방식의 올스타전을 도입했다. 일본은 양대 리그 체제가 확립된 1951년부터 시작했고, 한국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올스타전이 열렸다.
# 올스타전 출전 선수는 어떻게 뽑나
올스타전은 10개 구단이 드림 올스타와 나눔 올스타로 양분된다. 드림 올스타는 두산, 롯데, SK, 삼성, KT로 구성된다. 나눔 올스타에는 KIA, NC, LG, 넥센, 한화가 속해 있다. 전년도 성적과 무관하게 이미 팀이 나눠져 있는 터라 때로는 전력이 확연하게 한쪽으로 기우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역대 상대 전적은 과거 ‘동군’으로 분류됐던 드림 올스타가 월등하게 앞서 있고, 8개 구단 체제였던 2009년엔 전년도 1~4위 팀과 5~8위 팀이 대결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팀에 다섯 구단이 소속되는 올스타전에서 양 팀 감독을 선정하는 기준은 역시 직전 시즌 성적이다. 5개 팀 가운데 직전 해 팀 순위가 가장 높았던 구단 감독이 사령탑으로 선임되고, 다른 감독 네 명은 코치를 맡는다. 이런 이유로 2013년 올스타전에선 선동열 당시 KIA 감독이 오랜 스승인 김응용 당시 한화 감독과 고려대 선배인 김경문 당시 NC 감독을 코치로 ‘모시느라’ 땀을 흘리는 해프닝도 펼쳐졌다. 올해는 지난해 우승팀 SK의 염경엽 감독이 드림 올스타 사령탑으로 나서고, 나눔 올스타에서 지난해 가장 높은 순위(3위)로 시즌을 마친 한용덕 한화 감독이 반대쪽 지휘봉을 잡는다.
한 팀에는 팬 투표와 선수단 투표 결과를 합산해 선정된 베스트 멤버 12명과 감독 추천 선수 12명이 포함된다. 투수는 2016년부터 선발-중간-마무리로 세분화됐다. 원래는 투수도 다른 포지션처럼 한 명만 뽑았던 터라 대부분 에이스급 선발 투수들이 올스타 베스트 멤버로 선정되곤 했다. 하지만 리그 최강의 불펜 투수들도 베스트 멤버로 출전할 자격이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중간과 마무리 부문이 신설됐다.
투표 방식도 달라졌다. 당초 팬 투표 결과를 100% 반영해 베스트 멤버를 뽑곤 했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투표가 도입되면서 인기 구단 선수들이 라인업 대부분을 점유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2015년부터 선수단 투표 결과를 30% 반영해 ‘올스타’의 공정성을 높였다.
이 때문에 팬 투표에서 2위로 밀리고도 선수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해 올스타로 뽑힌 선수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LG의 오지환과 이형종이 팬 투표와 선수단 투표에서 모두 2위를 하고도 총점에서 앞서 베스트 멤버로 뽑히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올해 역시 팬 투표에선 LG 김현수가 전체 1위를 차지했지만, 선수단 투표에선 SK 외국인 타자 제이미 로맥이 김현수를 앞섰다. 그 결과 팬 투표 2위에 오른 로맥이 총점 49.63점으로 김현수(49.61점)를 근소하게 앞서 최고 득점 올스타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또 드림 올스타 유격수 부문의 두산 김재호와 지명타자 부문의 두산 호세 페르난데스는 나란히 팬 투표 2위에 올라 각각 삼성 이학주와 SK 정의윤에 뒤졌지만, 선수단의 지지를 더 많이 받아 베스트12로 최종 선정됐다.
#미스터 올스타는 누구에게 가나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올스타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는 ‘미스터 올스타’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기자단 투표를 통해 결정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임팩트’다. 안타를 많이 친 선수보다는 홈런 한 방을 친 선수가 더 많은 점수를 얻는다.
실제로 2007년엔 4안타를 친 이대호 대신 역전 2점 홈런을 때려낸 정수근이 ‘별 중의 별’로 선정됐다. 같은 이유로 1~2이닝씩만 소화하고 마운드를 내려가야 하는 투수들은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지난해까지 역대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한 투수는 1985년 삼성 김시진과 1994년 태평양 정명원 밖에 없다. 또 두산 타이론 우즈는 2001년 여전히 역대 유일한 외국인 미스터 올스타로 남아 있다.
미스터 올스타는 롯데가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무려 15번이나 된다. 그 다음으로 많은 KIA(전신 해태 포함)가 6차례이니 말 다 했다. 김용희가 1982년과 1984년, 박정태가 1998∼1999년, 정수근이 2004년과 2007년, 이대호가 2005년과 2008년에 두 번씩 수상했다. 또 허규옥이 1989년, 김민호가 1990년, 김응국이 1991년, 홍성흔이 2010년, 황재균이 2012년, 전준우가 2013년, 강민호가 2015년에 각각 MVP로 뽑혔다.
전준우는 역대 최초로 1·2군 올스타전 MVP를 석권한 진기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신인이던 2008년 퓨처스 올스타전에서 만루 홈런을 포함해 3타수 3안타(1홈런)를 기록해 당당하게 MVP에 올랐다. 이후 2010년부터 1군 무대에서 자리를 잡아 2011년 처음으로 1군 올스타전에 베스트 멤버로 출전했고, 2013년 올스타전에서 4타수 3안타(1홈런) 2타점 1도루로 맹활약해 ‘만장일치급’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
#번외 이벤트가 더 재밌다?
사실 올스타 메인 경기보다 재미있는 건 번외 이벤트다. 선수들의 야구 재능을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다. 일부 해외 언론이 KBO 리그 올스타전의 다양한 이벤트를 보고 “심심하기만 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도 KBO를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고 썼을 정도다.
많은 이벤트들 가운데 과거 가장 화제를 모았던 건 ‘스피드킹’과 ‘투수 슬러거’였다. 타자들의 ‘구속’을 측정하고 투수들의 ‘홈런’ 수를 센다는 점에서 완벽한 역할 맞바꾸기 게임이었다. KBO 리그 주전 선수 대부분이 고교 시절까지 팀의 에이스이자 4번 타자를 겸업한 경험이 많기에 더 흥미진진했다.
스피드킹은 2005년과 2006년 올스타전에 개최됐다가 사라졌고, 2011년 한시적으로 부활했다가 이듬해 다시없어졌다.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지만, 선수들의 부상 위험이 큰 이벤트라는 의견이 많아 지속하기 어려웠다.
2005년 올스타전 스피드킹 우승자는 당시 현대 소속이던 내야수 정성훈. 그는 두 번째 공을 던지다 스피드건에 시속 152km라는 믿기지 않은 숫자를 찍었다. 초구에 시속 138km를 기록한 뒤 의욕이 높아졌고, 다음 공을 더 강하게 던지려다 손에서 빠져 스트라이크존보다 한참 높은 위치로 날아가는 해프닝이 연출됐다. 하지만 전광판에는 그 공의 구속이 시속 152km로 나타났다. 스피드건 오작동이 확실해 보이는 기록. 3구째 스피드가 시속 142km로 다시 낮아져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미 측정된 구속을 무효로 판정할 만한 기준도 따로 없었다. 결국 정성훈은 놀라운 역사를 남기고 우승해 상금 200만원을 받았다.
2006년에는 ‘강견 유격수’로 유명했던 두산 손시헌이 시속 145km라는 투수 뺨치는 구속으로 우승자가 됐다. 또 5년 만에 부활한 2011년 스피드킹에선 역시 고교 시절까지 투수로도 이름을 날렸던 최정이 시속 147km를 찍어 경쟁자들을 여유 있게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투수 슬러거는 스피드킹과 함께 2005년 처음으로 생겼다가 단 한 해만 진행된 뒤 다시 열리지 않았다. 역시 투수들의 부상을 우려해서다. 또 생각보다 첫 해 참가한 투수들이 홈런을 많이 치지 못해 승부가 싱거워진 탓도 있었다. 총 7명의 투수가 참가했지만, 아웃카운트 5개가 올라가는 동안 현대 외국인 투수 미키 캘러웨이와 한화 문동환 두 명만 나란히 1개씩 담장을 넘기는 데 그쳤다. 비거리에서 문동환을 앞선 캘러웨이가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자였다.
이 외에도 홈플레이트에서 번트를 대 지정된 점수판에 공을 가까이 굴려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번트왕’, 티 배팅으로 안타 코스에 놓인 과녁을 라인드라이브로 맞춰 타자의 정확성을 체크하는 ‘퍼펙트 히터’ 등이 올스타전을 거쳐 갔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벤트는 2013년부터 올해까지 진행된 ‘퍼펙트 피처’. 야구 배트를 줄지어 세워놓고 1분 안에 공 10개를 던져 쓰러트린 방망이의 총 개수를 점수로 환산해 승자를 가린다. 배트 한 개당 1점이고, 이 가운데 붉은 배트를 쓰러트리면 2점을 받을 수 있다. 콜로라도 오승환이 과거 우승자 가운데 한 명이고, 지난해에는 NC 양의지가 막판 집중력을 보여 1위에 올랐다.
올해는 지난해를 끝으로 없어진 퍼펙트 히터 대신 ‘슈퍼 레이스’가 신설됐다. 선수들과 야구팬, 마스코트가 팀을 구성해 그라운드에 설치된 6개의 장애물 코스를 통과하는 경주 이벤트다. 처음으로 선수들과 팬들이 함께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가 마련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올스타전 최대 번외 이벤트 ‘홈런 레이스’ 뭐니 뭐니 해도 올스타전 번외 이벤트의 ‘꽃’은 1993년부터 시작된 홈런 레이스다. 화제성으로는 본 경기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각 팀의 대표 거포들이 출전해 오직 ‘누가 타구를 펜스 밖으로 더 많이 넘기느냐’를 두고 대결한다. 배팅볼을 던져줄 상대도 출전 선수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주로 올스타전에 함께 출전한 친한 동료에게 부탁하지만, 의욕적인 선수는 아예 팀에서 배팅볼을 전문으로 던져주던 구단 직원을 대동하기도 한다. 역대 홈런 레이스에서 가장 많이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총 세 명. 지금은 은퇴한 양준혁(1993·1998·2001) 박재홍(1997·1999·2008) 그리고 현역 선수인 한화 김태균(2005·2007·2012)이다. 지난 2018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대호. 연합뉴스 관심이 폭발적인 만큼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많이 나온다. 롯데 이대호는 2009년 올스타전에서 당대 최고 거포의 위력을 뽐냈다. 홈런 레이스 결승에서 10아웃 동안 타구 5개를 담장 밖으로 넘겨 ‘홈런 킹’이 됐는데, 그 가운데 4개가 장외홈런이었다. 당시 장소는 지금은 사라진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 사직구장을 주 무대로 활약했던 거포에게는 무등구장이 아담하게 느껴진 듯하다. 이대호는 예선에서도 홈런 6개를 쳐 출전 선수 7명 가운데 1위로 결승에 올랐다. 이때 장외로 날아간 이대호의 타구가 근처에 주차된 승합차 유리창을 강타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차 주인은 올스타전 식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던 가수 김창렬의 매니저. 다행히 김창렬 일행이 이 상황을 즐거운 해프닝으로 받아들였고, 유사 상황을 대비해 미리 보험에 가입해 둔 KBO가 수리비 전액을 부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김태균도 2012년 올스타전에서 무시무시한 능력을 뽐냈다. 예선에서 무려 14개를 때려 비공식 최다 기록을 세웠고, 결승에서도 6개를 담장 밖으로 넘겼다. 경쟁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예선에서는 타구 8개를 연속으로 펜스 밖으로 날렸다. 이미 레이스를 끝낸 선수들은 기가 죽었고,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선수들은 “난 그냥 기권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풍경도 펼쳐졌다. 지금까지 결승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쳐 홈런 레이스 우승자가 된 타자는 두 명뿐이다. LG 김현수가 두산 시절인 2010년(10홈런·당시만 7아웃)과 2014년(14홈런)에 두 차례 홈런 10개 이상을 쳤고, KT 황재균이 롯데 시절인 2015년 홈런 11개로 우승을 했다. 반대로 2006년에는 당시 현대 소속이던 이택근(넥센)이 결승에서 삼성 양준혁과 맞붙었지만, 아웃카운트 10개가 올라가는 동안 딱 1개의 홈런을 치고 우승했다. 경쟁자인 양준혁은 아예 하나도 치지 못했다. 역대 홈런레이스 최소 기록으로 쑥스러운 1위. 유독 투고타저가 심했던 그해는 예선전도 싱거웠다. 이택근의 4개가 가장 많은 홈런 수였다. 1996년 LG 심재학과 1997년 현대 박재홍도 단 2개씩만 홈런을 치고 우승했지만, 2006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심재학이 출전한 1996년엔 아웃카운트 수가 아니라 타격 기회가 10번씩만 주어졌고, 박재홍이 출전한 1997년엔 5아웃제로 진행됐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