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새벽, 검찰은 출입기자단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김태한 대표 구속이 무산된 직후였다. 검찰은 문자에 “혐의의 중대성, 객관적 자료 등에 의한 입증의 정도, 임직원 8명이 구속될 정도로 이미 현실화된 증거인멸, 회계법인 등 관련자들과의 허위진술 공모 등에 비춰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추가 수사 후 영장 재청구 등을 검토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담았다.
검찰 안팎에선 이번 입장문이 법원을 향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동안 관심이 집중된 사건과 관련해 의례적으로 해왔던 설명 또는 해명이라기보다는 “법원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항의’의 성격이 짙었다는 얘기다. 검찰은 입장문을 보내고 곧바로 영장 재청구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김태한 대표. 사진=일요신문 DB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9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김 대표와 삼성바이오 임원 2명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명 부장판사는 기각 사유에 대해 “주요 범죄 성립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김 대표 등은 미국 합작사인 바이오젠이 가진 콜옵션으로 인한 부채를 감추다가 2015년 말 바이오젠의 콜옵션 행사 가능성이 커졌다며 회계 처리 기준을 바꿔 장부상 회사 가치를 부풀린 혐의(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등) 등을 받는다.
검찰 입장에선 이번 김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에 담긴 의미들이 결코 작지 않았다. 검찰은 삼성바이오와 관련한 수사 7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사건의 본질인 분식회계 혐의를 이번 구속영장에 담았다. 첫 번째 영장부터 법원 문턱에 걸린 셈이다. 앞서 8명의 삼성 임직원이 구속됐지만 사유는 모두 부차적 혐의인 증거인멸이었다.
검찰은 김 대표 신병이 확보되면 분식회계 혐의에 대한 수사에 속도를 낼 계획이었다. 특히 김 대표는 삼성그룹 수뇌부로 향하는 ‘길목’으로 통했는데, 구속 불발로 분식회계를 지시했다는 의심을 받는 삼성그룹 ‘윗선’ 또는 ‘최대 수혜자’ 등에 대한 수사 계획은 일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법원이 범죄 성립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밝힌 점은 검찰로서는 치명적이다. 서초동의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번 법원 판단은 분식회계 혐의 자체에 의문이 있다는 뜻”이라며 “과거와 현재의 금융당국과 법원, 전문가들의 해석과 판단이 각각 엇갈리는 만큼 수사보다는 정식 재판을 통해 다퉈야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 바이오 측의 주장이 상당부분 받아들여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법원의 판단에 대해 강도 높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팀은 ‘고의 분식회계’라는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 판단을 바탕으로 구속영장을 작성했고, 증거인멸로 임직원 8명이 구속된 데다 감사를 맡았던 회계 법인도 최근 조작 사실을 인정하는 등 충분히 혐의가 소명 됐다고 판단해 왔다”며 “법원의 결정은 존중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검찰 내부 분위기가 비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오히려 “사실관계가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김 대표와 삼성 측이 사실상 분식회계를 인정하는 진술에 주목한다. 이 진술에도 결과적으로 구속영장은 기각 됐지만 검찰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태한 대표는 최근 검찰 조사에서 2014년 10월에 이미 미국 합작사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의 가치를 평가해 왔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개입했다는 점을 일부 인정했다. ‘2014년 콜옵션 가치 평가’는 기존 삼성 측 주장과 반대되는 주요 증거다. 삼성바이오는 미리 콜옵션 가치를 평가해 놓고도 2015년 3분기까지 부채인 콜옵션을 공시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 점을 분식회계로 판단한다.
그동안 삼성바이오 측은 2015년 전까지는 콜옵션의 가치 평가가 불가능했지만 같은해 말 가치 평가가 가능해지면서 급히 이를 반영해 회계 기준을 변경했다고 주장해 왔다. 김 대표가 스스로 삼성 측 주장을 뒤집은 셈이다.
이 때문에 김 대표와 삼성 측은 이번 영장실질심사에서 새로운 논리를 들고 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실질심사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기업의 실질가치를 고의로 훼손시킨 분식회계가 아니다“란 입장을 강조하면서도 ”2015년 삼성바이오의 장부상 자본잠식을 피하기 위해 회계법인과 함께 회계처리를 불가피하게 변경해야만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좋은 회사(삼성바이오)의 자본잠식을 막은 것은 잘한 일 아니냐”는 취지의 주장도 펼쳤다고 한다.
검찰은 이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회사는 그대로인데 회계방식 변경을 통해 자본잠식을 피한 것 자체가 분식회계라고 지적한다. 앞서의 검찰 관계자는 “수사팀은 김 대표와 삼성 측이 자본잠식 회피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회계처리를 했다고 판단한다”며 “김 대표와 삼성 측의 주장이 수사 과정에서 삼성 측의 기존 주장을 뒤집는 증거들이 나오자 진술을 바꿨는데, 사실상 자백으로 비춰지는 진술이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해석했다.
검찰은 증거인멸 혐의도 다시 점검하고 있다. 특히 김 대표와 같은날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던 삼성바이오 재무책임자인 김 아무개 전무의 주장이 엇갈린 점을 눈여겨 보고 있다. 김 대표는 “김 전무가 회계 업무를 전반적으로 처리했고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김 전무 측은 “회계 처리부터 증거인멸 과정까지 김 대표가 모두 알고 있었다”며 “대표라는 직위를 고려하면 김 대표에게 비난 가능성이 더 크다”는 취지로 반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무는 앞선 검찰 조사과정에서 분식회계 혐의도 일부 인정했다고 한다.
검찰은 김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다만 법원의 판단 기준이 검찰과 달랐던 점을 확인한 만큼 재청구 과정에서 법원을 설득할 방법에 대해 고민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차 기각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김 대표를 건너뛰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그룹 수뇌부 조사에 착수할 가능성도 나온다.
특히 검찰은 삼성바이오의 콜옵션이 공시되지 않으면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이 부회장 등 총수 일가가 지분을 많이 가진 제일모직에 유리한 비율이 적용됐다는 점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