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초등학생이다.
“한국엔 ‘스미레’가 없나요?” 바둑팬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다. 없을 리 없다. 한국에선 중학생 이하 어린 유망주 중에선 김은지(초6)가 가장 유명하다. 실력은 독보적이다. 또래 남자연구생도 김은지를 잘 이기지 못한다. 또 있다. 한종진 도장이 자랑하는 ‘창과 방패’ 김효영(중1)과 정유진(중1)도 있다. 이들은 여자연구생 순위로 따지면 4~5위 정도지만, 발전가능성이 무한하다.
스미레(오른쪽)는 두 언니, 김효영과 정유진과 대국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 한도장에 오면 라이벌뿐 아니라 친구도 있다. 영재반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나현(왼쪽)은 스미레의 동갑 친구다.
일본 내에서 행사와 대국 일정이 바쁘지만, 스미레는 시간을 짜내서 한국에 온다. 보통 2주 정도 머문다. 평소처럼 공부하고, 바둑을 둔다. 일본 내 프로연구회나 도장이 아니라 서울 왕십리에 있는 한종진 도장에서 찾는 이유는 있다. 10살, 어린 나이에 입단한 스미레는 또래 라이벌이 없다. 한 단계씩 성장해야 하는데 홀로 가려니 외롭다. 한국에 오면 친구도 있고, 승부를 겨룰 언니도 많다. 지면 열 받는 ‘라이벌’과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모두 한종진 도장에 있다.
한종진 9단은 “원래 스미레, 김효영, 정유진이 함께 라이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스미레보다 3살 언니다. 지금도 한 판이라도 지면 눈물 흘리는 사이다. 효영과 유진이 한도장에서 사이좋게 잘 지내지만, 연구생리그를 두는 날엔 같이 점심도 안 먹을 정도로 경쟁의식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공부하니 실력 상승세가 아주 가파르다. 스미레 부모님도 올 때마다 효영과 유진이 두는 도장리그 성적을 유심히 살핀다. 스미레가 빠진 동안 이 둘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라이벌이 있으면 실력향상이 쉽다. 스미레가 이곳에 오는 가장 큰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 춘향배에서 우승한 김효영.
#기보로 보는 유망주1 ‘창, 공격적인 김효영’
김효영은 ‘창’이다. 기풍이 아주 공격적이다. 한종진 원장은 “최근에 부쩍 자신감이 늘었다. 그런데 꼭 대마를 잡으려다 탈이 난다. 조금만 더 안정적으로 두면 승률이 좋을 텐데…”라고 말한다. 이에 김효영은 “바둑은 싸우는 재미”라고 맞받아친다. 13살이다. 재미가 없다면 바둑을 둘 이유가 없다.
김효영은 2013년부터 바둑을 배웠고, 올해 아마 여자 정상에 올랐다. 지난 6월 남원에서 열린 제4회 국제춘향선발대회에서 김지은, 류승희 쟁쟁한 여고수 언니들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다. ‘춘향’에게 꿈을 묻자 “최정 사범님처럼 센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장면도1
[장면도1] 제4회 국제춘향선발 결승2국/ ●류승희 ○김효영/ 258수 백8.5집승
흑이 1, 3으로 먼저 압박했다. 그러나 백은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 원군(백 세모표시)을 믿고 강하게 받아쳤다. 김효영은 “이 판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수는 백16, 백20으로 둔 마늘모”라고 말했다. 백16에선 목덜미에 칼날을 들이댄 서늘함이 있다. 백20은 묵직한 한 방을 노리고 주먹을 모은 느낌이다. 이 모양에선 당장 백이 A단수를 선수로 하고 B로 끊어 두 점을 잡는 맛도 있다. 백은 두텁고, 흑만 곤마다. 공격적인 김효영 기풍이 잘 드러난 초반이다. 박지은 9단은 이 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놔본 후에 “힘이 아주 좋다. 잘 두는 바둑이다. 굉장히 세게 두는데 더 높은 경지로 가려면 강약조절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내 최초로 을조리그에 참가한 아마추어 여자 정유진.
#기보로 보는 유망주2 ‘방패, 부드러운 정유진’
정유진은 올해 6월에 중국에서 열린 여자을조리그에 선수로 출전했다. 한국연구생 중에선 처음이었다. 프로기사와 중국 아마추어기사를 상대로 4승 3패했다. 대회를 다녀와선 “좋은 경험이었다. 누구라도 내 바둑이 통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엔 프로기사 자격으로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유진은 실리를 챙기며 두텁게 천천히 두는 스타일이다. 한도장이 키우는 비밀병기 ‘방패’형 기사다.
장면도2
[장면도2] 한종진 도장 자체 리그전/ ●프로기사 ○정유진/ 138수 백불계승
백1 날일자 걸침에 흑2 높은 협공. 고전정석이다. 최신버전 완결판을 정유진이 보여준다. 백5로 끊을 수 있는 이유는 멀리 축머리(우하귀 백세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흑A 뻗음이 당연했던 옛 정석이다. 이후 백B, 흑C 정도 타협이다.
실전진행
[실전진행]
흑1 마늘모가 고정관념을 깨고, 효율을 추구한 신수다. 최근 프로기보에선 흑1, 백2 이후에 흑3 단수, 백6 뻗음, 흑4 빵따냄하고 백A로 두텁게 잡는 내용이 있었다. 정유진은 백4로 늘어 한술 더 뜬다. 두 점으로 키워 더 활용하는 방법이다. 실전은 흑이 끝내기 선수 정도로 만족했다. 이렇게 알뜰하게 실리를 차지하고, 천천히 두어가는 게 정유진의 기풍이다. 백4로 한번 느는 수를 보곤 지도사범이 깜짝 놀란다. “이거 누구에게 배웠어?”라고 물으니 “AI로 놓아봤어요”라고 답한다. 프로가 모르는 수를 연구생이 두는 세상이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