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운영하는 방송국 UNI-TV. 사진=홈페이지 캡처
통일부는 2011년부터 자체 방송국인 Uni-TV를 개설해 남북관계와 통일 정책 등을 영상 콘텐츠로 제작해 소개하고 있다. A 씨도 Uni-TV의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2018년 3월 한 캐스팅 디렉터로부터 통일부가 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통일부에서 탈북민들을 위한 드라마를 만드는데 참여할 의사가 있냐는 것이었다. 촬영 시작은 당장 이틀 뒤였다.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통일부의 사업 취지에 공감한 A 씨는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틀 뒤 A 씨는 9시간 동안 8분가량의 드라마를 2편 찍었다.
문제는 출연료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A 씨에 따르면 애초 캐스팅 디렉터가 약속한 출연료는 편당 10만 원. 지급일은 촬영일로부터 2주가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촬영이 끝나고 수개월이 지나도 출연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캐스팅 디렉터와 에이전시 대표에게도 여러 차례 연락을 했으나 “미안하다. 곧 지급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A 씨는 에이전시 대표에게 “통일부와 에이전시를 상대로 임금체불 조정신청을 진행하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출연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미 1년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가 1년 4개월을 기다려 받은 출연료는 9만 원. A 씨가 항의하자 에이전시는 처음부터 20만 원을 말한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계약서를 쓰지 않은 탓에 어떠한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통일부는 무책임했다.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고 에이전시에게 출연료 전부를 지급했으므로 그 외 임금 문제는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른바 ‘턴키 계약’이라고 부르는 도급계약을 맺었다는 뜻이었다. A 씨는 “정부사업이라고 해서 신뢰를 갖고 참여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에이전시 때문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하니 통일부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굉장히 무책임하게 들렸다”고 말했다.
이른바 ‘턴키 계약’이라고도 부르는 도급계약은 방송계에서는 오랜 관행인 동시에 퇴출 1순위로 지목되는 방송가의 ‘적폐’다. 방송 노동자가 어떠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 지상파 방송국에서는 턴키 계약을 개별 계약의 형태로 바꾸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 정부 부처인 통일부에서 되레 시대 흐름에 역행해 적폐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A 씨와 같은 방송 연기 노동자의 근로 환경은 방송 스태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속사가 따로 없는 단역 배우의 경우 임금 체불을 당하거나 에이전시가 턴키 계약을 맺는 사례가 흔한 까닭이다. 방송사가 에이전시와 턴키 계약을 맺을 경우 배우의 처우는 전적으로 에이전시에 달려있다. 임금 체불을 당할 경우 신고하면 되지만 다음 작품에 캐스팅이 어려워지는 등 2차 피해를 우려해 실제로 신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방송 출연 표준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도 드물다. A 씨 역시 통일부가 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어떠한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KTV와 아리랑TV 등 공공 영역 방송 기관 10곳에 표준계약서 작성과 이행을 강력하게 당부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실태 조사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문체부에서 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해 강력하게 권고되는 표준계약서 작성이 정작 통일부 방송국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주우 사무국장은 “캐스팅 디렉터를 통한 턴키 계약은 과거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으나 최근에는 방송계에서도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정부 부처에서 이런 식으로 드라마를 자체 제작해왔다니 놀라울 뿐이다. 표준출연계약서 문제도 마찬가지다. 표준 계약서는 2013년 문체부가 마련해 방송사와 제작사에게 권고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그러나 이처럼 실제 현장에서는 계약서 작성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어 정부 차원에서 강제 이행 조치를 내릴 필요성이 있다”고 답했다.
통일부 방송팀 관계자는 “배우 개인이 아닌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임금 체불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면서도 “앞으로는 1명의 피해자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매 회마다 꼼꼼히 챙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A 씨는 “문제를 제기하는 배우를 좋아하는 프로덕션은 없다. 단지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목소리를 냈다. 이런 식으로 사업이 계속 진행된다면 나 말고도 또 다른 피해자들이 발생할 것“이라며 ”이번 일로 단역 배우들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